목록2024/03/21 (15)
En Hakkore
앞의 글에서 우리는 야곱이 에서와 헤어진 후 나중에 세일로 찾아가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반대쪽으로 이동한 것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창세기 34장의 슬픈 기록은 그냥 건너뛰었다. 창세기 34장의 끔찍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야곱이 급히 세겜을 떠났을 것으로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야곱에게 라반은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에서 또한 피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이제 또 다시 세겜 사람들로부터도 피해야만 했다. 그러면 이제 그는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아, 가련한 야곱이여! 그는 진퇴유곡 가운데 빠져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극단의 상황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의 기회가 시작되는 법이다. 그것은 여기의 야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은 다시 한 번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때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30:8). 에서는 자신이 앞서 만난 짐승떼의 의미를 알고자 했다. 야곱의 대답은 매우 솔직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형의 마음을 움직임에 있어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신의 예물을 의지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또 여기에서 야곱이 에서를 어떻게 부르는지 주목해 보라. 5절에서 스스로를 "당신의 종"으로 부른 것처럼, 또한 그는 여기에서 에서를 "나의 주"라 부른다. 이러한 굽실거리는 태도는 세상 사람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합당한 태도가 아니다. 이러한 그의 지나칠 정도로 비굴한 태도는 그의 노예적인 두려움을 그대로 보여 준다. 이러한 태도는 그가 형의 우월성을 인정할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음..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가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헤롸 요셉은 뒤에 두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창 33:1-3). 여기에서 우리는 야곱의 믿음에 또 다시 반전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한다. 사실이 허구보다 더 이상한 법이다. 그것은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야고보는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마치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는" 사람과 같다고 말한다(약 1:24). 세상에 있는 모든 책들 가운데 성경만큼 사람의 마음속에 가장 깊숙이 숨어 있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
여기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신자 안에 있는 육체"와 관련한 가장 상징적이며 두드러진 그림을 발견한다. 신자 안에 있는 "육체"는 얼마나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것인가! 또 그것은 얼마나 고치기 어려운 것인가! 하나님은 그것에 대해 놀랍도록 오래 참으시며 다투시는 가운데, 마침내 그것을 이기신다.♡ 첫째로, 에서에게 보낼 예물을 선택하고 배치하는 것에서 우리는 "육체"의 성격과 활동을 보게 된다. 그것은 계획하며 전략을 세운다. 둘째로, 야곱의 경험 안에서 우리는 "육체"의 무력함과 무가치함을 보게 된다. 셋째로, 오직 하나님과 더불어 "홀로"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아무것도 아님(nothingness)을 배우게 된다. 넷째로, 야곱과 더불어 씨름하기 위해 온 신비한 방문자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이 신자..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25절).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쉽게 야곱의 저항을 무력화시키고 그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드실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단지 "허벅지 관절을 건드리는(touch)" 것뿐이었다(한글개역개정판에는 "허벅지 관절을 치매"라고 되어 있음). 이로써 한 순간에 야곱의 모든 힘은 사라지고 말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사건의 비밀을 여는 두 번째 열쇠를 발견한다. 야곱이 가진 모든 자원은 이제 다 없어졌다. 하나님의 손이 한 번 살짝 건드리는 것으로 그는 완전히 무력해졌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다루심의 목적이다. 우리..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밤에 일어나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32:21-24). 우리는 여기에서 야곱의 생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기의 순간을 보게 된다. 창세기는 야곱을 두 가지 모습으로 제시한다. 이를테면 하나는 야곱의 모습으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의 모습으로 말이다. 전자는 자연적인 사람이며, 후자는 영적인 사람이다. 이제 우리는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공식적으로 받게 되는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빼앗는 자"라는 이름을 가졌던 자는 이제 "하나님이 명령하시다" 라는 이름을 ..
앞장에서 우리는 밧단아람으로부터 돌아오는 도중에 야곱에게 벌어진 사건을 살펴보았다. 그때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를 만났는데, 그들은 두 무리로 나누어져 있었다. 아마도 그들 가운데 한 무리는 앞에서 그리고 다른 한 무리는 뒤에서 그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천사들이 이와 같이 배치된 것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은 방금 야곱을 그의 뒤에 있는 적으로부터 구원하셨다(라반의 무리). 그와 같이 이제 하나님은 그를 그의 앞에 있는 적으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다(에서의 무리). 천사들이 사라지고 난 후 야곱은 사자들을 에서에게 보내 그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자 했다. 사자들은 곧바로 야곱에게로 돌아와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오고 있다는 두려운 소식을 전했다. 그리하여 야곱은 ..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32:6).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에서 볼 때, 야곱이 보낸 사자들은 단지 멀찍이서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오는 것만을 발견했을 뿐 자신들의 메시지를 그에게 전달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에서가 이미 자신이 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보고는 틀림없이 야곱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야곱이 외삼촌의 집을 떠나온 것이 불과 두어 주 전의 일이었다. 그의 여행은 조용히 진행된 것이었지, 결코 요란스러운 행차가 아니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에서가 그것을 알 수 있었단 말인가? 그 동안 복수심에 불타 계속해서 동생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단 말인가? 라반의 일꾼들 가운데 에서가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