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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124] 브니엘에서의 야곱(창세기 32장) 본문

강해시리즈/창세기 강해 (Gleanings In Genesis)

[창세기 강해 124] 브니엘에서의 야곱(창세기 32장)

En Hakkore 2024. 3. 21. 11:15

앞장에서 우리는 밧단아람으로부터 돌아오는 도중에 야곱에게 벌어진 사건을 살펴보았다. 그때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를 만났는데, 그들은 두 무리로 나누어져 있었다. 아마도 그들 가운데 한 무리는 앞에서 그리고 다른 한 무리는 뒤에서 그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천사들이 이와 같이 배치된 것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은 방금 야곱을 그의 뒤에 있는 적으로부터 구원하셨다(라반의 무리). 그와 같이 이제 하나님은 그를 그의 앞에 있는 적으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다(에서의 무리).

천사들이 사라지고 난 후 야곱은 사자들을 에서에게 보내 그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자 했다. 사자들은 곧바로 야곱에게로 돌아와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오고 있다는 두려운 소식을 전했다. 그리하여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했다"(32:7).

그는 먼저 동행한 무리와 모든 소유를 둘로 나눈 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앞장에서 우리는 그의 기도를 비교적 자세히 고찰하면서 거기에 나타나는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들을 살펴보았다. 한 마디로 그것은 우리가 본받을 만한 믿음의 기도였다.

이제 그러한 기도 후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주목해 보도록 하자. 여기에서 한 가지 놀라운 대조가 즉시로 우리의 주의를 끈다. 그것은 정말로 터무니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우리의 경험 속에서 무수히 반복되는 대조이다. 야곱은 곧바로 믿음의 행동으로부터 불신앙의 행동으로, 기도로부터 잔꾀로, 하나님으로부터 육신적인 전략으로 돌아간다.

"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32:13)

형에게 예물을 보내는 것 자체에는 잘못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문제는 그렇게 하는 동기(動機)였다. 그리고 이것 역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해 기록된" 것임을 기억하라(고전 10:11). 이어지는 말씀 가운데 야곱의 중심이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거짓되며 악한 중심을 좀 더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만일 그의 동기가 정말로 정당하고 칭찬할 만한 것이었다면, 그는 형에게 보낼 예물을 준비하면서 그렇게 조바심을 내며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먼저 그는 자신의 예물을 세 무리로 나누었다. 그리고 각각의 무리 사이에 어느 정도 공간을 두었다.

이 모든 것은 어떻게 해서든 형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한 것이었다. 다음으로 야곱은 예물을 맡은 종들에게 에서를 만나 그가 "이 모든 것들이 누구의 것이냐" 고 묻거든 "당신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나이다"라고 대답하도록 시켰다(18절).

이러한 야곱의 메시지는 분명 하나님의 자녀의 존귀를 심히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나의 주 에서" 라든지 혹은 "당신의 종 야곱"과 같은 표현들을 보라. 지나칠 정도로 비굴하지 않은가! 세상에 속한 사람 앞에서의 이러한 비굴한 태도는 그의 마음 상태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그대로 보여 준다.

분명 야곱은 에서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을 신뢰하며 의지(依支)하는 것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20절의 독백은 그의 마음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 준다.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20절).

야곱은 화해의 영으로 역사(役事)하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대신 스스로의 노력으로 형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했다 - "내가" 그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라! 그러나 그 모든 인간적인 계획과 전략에고 불구하고 그는 단지 "형이 혹시 나를 받아주리라" 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모든 인간적인 수고와 노력은 우리를 확신으로 이끌지 못한다. 우리의 모든 수고의 결과는 고작해야 불확실한 "혹시 일 뿐이다. 이것은 믿음의 길과 얼마나 다른가! 이것은 하나님과 그의 약속을 굳게 붙잡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고요한 확신과 얼마나 다른가!

다음 주제로 넘어가기에 앞서 여기에서 잠깐 멈추고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중요한 질문 한 가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여기에 나타나는 야곱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주목해 보라.

바로 앞에서 그토록 진지하게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곧바로 자신의 육신적인 생각과 계획으로 돌아가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야곱은 결국 불신자(unbeliever)였단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제까지의 그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다루심은 그러한 개념을 명백히 배격한다. 그러면 그는 신자였다가 "은혜로부터 떨어져" 불신자가 되었는가? 우리는 이러한 개념 역시 분명하게 배격해야 한다. 성경은 거듭난 자가 다시 거듭나지 못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분명하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의 신실하지 못한 자녀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그의 자녀이다. 💕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함" 즉 "마음을 바꾸는 것"이 없다(롬 11:29). 일단 어떤 죄인이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그에게 빛과 구원을 주셨다면, 그는 결코 그러한 부으심을 무효화시킬 수도 또 그의 선물을 되돌릴 수도 없다.

그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기 위해 특별한 공로를 행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되돌리기 위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선물을 주시는 기초는 사람의 어떤 공로나 자격이 아니라, 오직 그의 주권적인 은혜이다.

이것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좋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 식의 태도는 단지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받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것일 뿐이다. 도리어 우리는 죄를 더욱 미워하며 조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잘못을 범한 결과를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으로 말미암아 그에 대한 우리의 깊은 감사를 나타내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에 대한 그의 풍성한 긍휼하심과 선하심에 대한 보답으로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것은 야곱과 관련한 앞의 질문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 되지 못한다. 야곱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였다. 창세기 32:9-12에 기록된 그의 기도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안에 "육체" 곧 악한 옛 본성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것에게 길을 내주었다.

육체는 항상 우리를 불신앙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동으로 이끈다. 신자 안에 있는 두 본성을 보여 주는 가장 분명한 실례(實例)를 우리는 야곱의 생애에서 발견한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경계"하기 위해 그것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셨다.

그러한 두 본성 즉 "하나님을 신뢰하는 영적인 본성"과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육체적인 본성"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같이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라고 기도해야 한다(막 9:24). 💕

Arthur W. Pink 창세기 강해 p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