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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123] 마하나임에서의 야곱 본문

강해시리즈/창세기 강해 (Gleanings In Genesis)

[창세기 강해 123] 마하나임에서의 야곱

En Hakkore 2024. 3. 21. 11:14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32:6).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에서 볼 때, 야곱이 보낸 사자들은 단지 멀찍이서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오는 것만을 발견했을 뿐 자신들의 메시지를 그에게 전달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에서가 이미 자신이 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보고는 틀림없이 야곱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야곱이 외삼촌의 집을 떠나온 것이 불과 두어 주 전의 일이었다. 그의 여행은 조용히 진행된 것이었지, 결코 요란스러운 행차가 아니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에서가 그것을 알 수 있었단 말인가? 그 동안 복수심에 불타 계속해서 동생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단 말인가?

라반의 일꾼들 가운데 에서가 보낸 정탐꾼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틀림없이 누군가가 에서에게 야곱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을 것이다. 따라서 에서가 지금 자신을 만나기 위해 오고 있다는 사실은 야곱에게 정말로 두려운 소식이었다. 그리하여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했다"(7절). 죄인은 아무도 고소하지 않아도 두려운 법이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32:7, 8).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그리하여 야곱은 특유의 용의주도함으로 신속하게 행동했다. 먼저 그는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과 짐승떼를 두 무리로 나누었다. 그렇게 하면 혹시 에서가 와서 한 무리를 친다 하더라도 최소한 다른 한 무리는 피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그는 기도에 의지(依支)했다.

여기에서 야곱을 비난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자. 우리 역시도 최후의 수단으로서 하나님을 찾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 역시도 먼저 계획을 세우고 머리를 짜내고 하다가 이도 저도 안되면 하나님께 부르짖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아, 우리 역시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격언의 기초 위에서 행동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들을 돕지 않는다. 도리어 스스로 도울 수 없음을 깨닫고 상한 마음으로 나오는 자들을 돕는다.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다(사 40:29).

야곱의 기도에는 주목할만한 부분이 많이 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매우 강력한 기도였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에 처음 기록된 실제적인 기도이다.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를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9-12절).

첫째로, 여기에서 야곱이 기도한 하나님을 생각해 보자. 그는 단순히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라 "그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에게 나아갔다. 그것은 언약관계 안에서의 하나님이었다. 그것은 신적 신실하심을 붙잡는 것이었으며, 믿음의 기도였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나아가, 확실한 관계의 기초 위에서 호소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 조상의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그러므로 우리의 아버지" 이신 하나님에게 나아간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러한 관계의 기초 위에서 기도할 때, 우리에게 복주시기를 기뻐하신다.

둘째로, 야곱은 스스로를 여호와의 확실한 말씀 위에 던졌다. 다시 말해서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에 호소했다.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9절). 여기의 야곱으로부터 우리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배운다.

성경에는 신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많은 약속들이 있다. 믿음의 길 가운데 시련과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그러한 약속들에 호소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여기의 야곱을 보라. 그는 하나님이 예전에 주신 약속을 붙잡고 그것에 호소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

고린도후서 12:9에서 우리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말씀을 읽는다. 매일 아침마다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라. 그리고 경건한 믿음으로 주님께 그가 전에 하셨던 말씀들을 일깨워드려라. 그리고 예전에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주여, 말씀하신 대로 행하시옵소서" 라고 말하라(삼하 7:25).

또 우리는 빌립보서 4:19에서 "나의 하나님이 ...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라는 말씀을 읽는다. 위급한 때에 이 말씀을 붙잡고, "주여, 말씀하신 대로 행하시옵소서" 라고 말하라.

셋째로, 야곱은 자신에게 아무런 공로도 없음을 완전히 인정했다. 그는 지극히 높은 자 안에 겸비한 자리를 취하면서, 그가 자신에게 빚진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고백한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10절).♡

사랑하는이여, 특별히 이것을 마음에 새기라. 오늘날 스스로를 낮추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성도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무자격을 고백하는 것은 매우 희귀한 일이 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라오디게아인들처럼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다른 신자들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에 아무런 자격이 없음을 고백하는" 것은 심히 꺼려하며 두려워한다.

나는 오늘날 사람들이 기도에 있어 실제적인 능력을 거의 갖지 못하는 주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고자 한다면, 먼저 우리는 그 앞에 티끌의 자리로 내려가야만 한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필요를 채움 받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빈 손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아무런 공로나 자격이 없음을 기꺼이 인정하며 고백해야 한다. 그리고 오직 은혜의 기초 위에서 그로부터 무엇인가를 받고자 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의 기도는 응답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기에서 야곱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탄원하도록 이끈 동기(動機)를 주목하라. 그의 기도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간절히 구하오니 나를 나의 형 에서의 손으로부터 구원하소서.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언뜻 보기에 여기에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육친(肉親)의 사랑 이상의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단순히 자상한 남편과 사랑이 많은 아버지의 간구로만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의 야곱의 기도를 마지막 끝맺음의 말에 비추어 다시 읽는다면, 우리는 그가 훨씬 더 높은 동기에 이끌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는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기도를 끝맺는다(12절). 이러한 끝맺음의 말 속에서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음을 알 수 있다.

여호와는 야곱의 씨를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만일 그의 처자들이 죽임을 당한다면, 그러한 하나님의 약속은 도대체 어떻게 성취될 것이란 말인가? 우리가 사랑하는 자들의 구원에 큰 관심을 갖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하등 잘못될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의 주된 관심은 단순히 우리와 친밀한 관계에 있는 자들의 복리(福利)에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된다. 그것보다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나머지 모든 것들은 이것에 종속되어야만 한다. 여기에 엄정한 시금석이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의 구원을 그토록 바라는 이유가 무엇인가? 단순히 그가 나와 가까운 혹은 나에게 사랑스러운 사람이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의 구원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리스도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기 때문인가?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우리의 끈질긴 "이기주의"(selfishness)를 제하시고 기도에 있어서의 우리의 동기(動機)를 정결하게 하소서!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

Arthur W. Pink 창세기 강해 p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