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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129] 에서를 만나는 야곱 본문

강해시리즈/창세기 강해 (Gleanings In Genesis)

[창세기 강해 129] 에서를 만나는 야곱

En Hakkore 2024. 3. 21. 11:19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때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30:8).

에서는 자신이 앞서 만난 짐승떼의 의미를 알고자 했다. 야곱의 대답은 매우 솔직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형의 마음을 움직임에 있어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신의 예물을 의지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또 여기에서 야곱이 에서를 어떻게 부르는지 주목해 보라.

5절에서 스스로를 "당신의 종"으로 부른 것처럼, 또한 그는 여기에서 에서를 "나의 주"라 부른다. 이러한 굽실거리는 태도는 세상 사람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합당한 태도가 아니다. 이러한 그의 지나칠 정도로 비굴한 태도는 그의 노예적인 두려움을 그대로 보여 준다. 이러한 태도는 그가 형의 우월성을 인정할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33:9).

에서의 이러한 말은 타인의 것을 원하지 않는 독립적인 정신의 표현일 수도 있고, 그의 너그러운 마음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아마도 후자가 좀 더 개연성이 높을 것이다. 에서는 결코 궁핍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두 사람 사이의 불화를 치료하는데 그런 종류의 예물은 필요치 않았다. 그리고 그와 같은 에서의 말은 야곱의 정교한 계획이 모두 쓸모없는 것이었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야곱은 자신이 어떻게 형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은 신경을 썼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을 위해 큰 비용을 치르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형의 격노를 너무나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결국 아무 소용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야기의 결말이 보여 주는 것처럼, 그 모든 것은 헛수고였다. 앞에서 하나님이 라반의 마음을 움직이셨던 것처럼, 여기에서도 하나님이 에서의 마음을 "녹이셨다." 야곱이 자신은 "가만히" 있고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일하시도록 맡겼다면 얼마나 더 좋았겠는가?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배우자. 그것은 우리의 모든 육체적인 계략과 수고는 불필요할 뿐 아니라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

야곱은 형의 너그러운 말로 만족할 수 없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선의(善意)의 증표로서 자신의 예물을 받아 줄 것을 간청했다.

"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10절).

다른 사람으로부터 예물을 받는 것은 항상 선의와 우호관계의 증표로서 간주된다. 아무도 원수로부터 예물을 받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다루심의 기저(基底)에도 같은 원리가 놓여 있다. 하나님은 죄인의 손으로부터 예물을 받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이 그의 아들의 속죄를 믿는 믿음으로 그와 더불어 화해할 때까지 말이다.

여러분은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손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않으실 것이다. 당신이 먼저 그의 손으로부터 그가 죄인들을 위해 예비하신 구주를 받을 때까지 말이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 먼저 그분께 무엇인가를 드려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멋지고 훌륭하며 자기희생적인 예물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가 여전히 배척되고 있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받지 않으실 것이다. 당신의 어떤 행위나 공로를 하나님께 드린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가 여전히 무시되고 있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모독하며 가인의 길로 행하는 것과 불과할 뿐이다.♡

성경은 이 부분을 가장 강조적인 언어로 가르친다.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니라"(잠 15:8). 야곱은 계속해서 간청했다. 그의 예물을 받는 것은 형이 자신에 대해 더 이상 악의를 품지 않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라고 말하면서,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라고 덧붙인다. 결국 그는 에서가 자신의 예물을 받도록 만드는데 성공한다.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11절).

"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연약하고 내게 있는 양 뗴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청하건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33:12-14).

형을 만났을 때 야곱의 두려움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러한 야곱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형이 이제 자신의 예물을 받았으므로, 야곱은 다시 형과 헤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에서의 생각 속에 언제 옛 적개심이 다시 떠오를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야곱은 가능한 대로 형과 멀리 떨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형의 감정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로 그들 무리가 서로 헤어져야만 하는 이유를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그러자 에서는 자신의 종 몇 사람을 머물게 하겠다고 제안한다.

"에서가 이르되 내가 내 종 몇 사람을 네게 머물게 하리라"(15절). 이것은 틀림없이 야곱의 무리가 위험한 지역을 지나가는 동안 보호해 주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형의 제안 뒤에 어떤 적대적인 계략이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그는 형의 제안을 사양했다. "어찌하여 그리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야곱은 에서를 불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는 에서에게 "청하건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라고 말했다(14절). 그러나 에서가 떠나고 난 후, 우리는 "야곱이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라는 말씀을 읽는다(17절).

야곱은 에서와 약속한 장소로 가는 대신,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동했다. 에서가 예상치 못한 온정을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하나님이 형의 마음을 변화시킨 것을 믿지 않았다. 그리하여 야곱은 에서를 불신하고, 몇 사람을 머물게 하여 보호해 주겠다는 그의 제안을 사양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또 다른 만남을 회피했다.

아,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라는 말씀은 얼마나 사실인가(시 39:5). 야곱의 불신앙은 그 땅으로 돌아오는 그의 여행이 지체된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는 대신 숙곳에 정착했다. 계속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는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18, 19절).

이것은 밧단아람에 있을 때 하나님이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인해 큰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신적 보응의 법칙은 결코 잠자는 법이 없으며, 야곱은 자신이 뿌린 것을 거둬야만 했다.

그것을 보기 위해 우리는 단지 그가 세겜에 거주하는 동안 그의 가정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읽어 보기만 하면 된다 - 그가 숙곳에 머무는 동안 그의 딸에게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창세기 33장 마지막 절에서 우리는 약간의 빛이 비치는 것을 발견한다.
  
"그가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20절).

이것이 믿음의 행동이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의 믿음의 깊이가 어느 정도였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주석가들 사이에 서로 의견이 엇갈린다.

그는 그 제단의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라고 불렀는데, 그러한 이름은 여호와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 사이의 언약관계를 놓치고 하나님을 단순히 자신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한 것이었다. 어떻든 간에 하나님은 야곱이 숙곳에 세운 제단을 기뻐하지 않으셨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이 창세기 35:1에 암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발견한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자. 부디 신적 은혜가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악함을 보게 하시기를 바란다. 또 우리가 육체를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를 깨닫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이끄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

Arthur W. Pink 창세기 강해 p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