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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4:4). 이것은 도덕적인 필요에 의한 것일 뿐 지리적인 불가피성 때문이 아니었다.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데는 두 개의 경로가 있었다. 좀 더 가까운 지름길은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길은 좀 더 멀리로 우회하는 길이었으나 베뢰아와 데가볼리를 거쳐 게네사렛 호수의 남쪽 해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유대인들은 대개 이 우회로를 택하였다. 그러나 주께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가 셔야만했던 이유는 신성한 불가피성 때문이었다. 그가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가야만 했던 것은 영원 전부터 정해진 일이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 중의 일부가 거기에 있었고, 그러므로 이들을 찾아서 구해야만 했다. 요한복음 10:16에 있는 주님 자신이 하신 말씀과 비교해 보라. "또..
사마리아는 여호수아 시대에 에브라임과 므낫세 반지파에게 배당된 지역이었다(수 16, 17장; 특히 17:7 참고). 이스라엘 열 지파가 반란을 일으킨 후 이 지역의 주민증으 일반적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반란을 일으킨 후 이 지역의 주민들은 일반적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였고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세운 사악한 우상 숭배를 따르게 되었다(왕상 12:25-33; 그리고 25절의 '세겜'을 건축했다는 말에 주목하라). 그리고 그들은 여로보암의 후계자들이 도입한 이방인들의 타락상에 쉽게 빠져들고 말았다. 이스라엘 열 지파 중에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앗수르로 포로가 되어 잡혀 가고 그들이 살던 지역에 주민들이 거의 아무도 남아있지 않게 된 후 앗수르로 포로가 되어 잡혀 가고 그들이..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4:2). 이것은 삽입적인 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고(故) 라일 주교(Bishop Ryle)는 이 말에 대하여 적절하게 논평하였다. "이 구절은 기독교에 있어서 세례가 최우선적인 적도, 주요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설명해 준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설교하신 것과 기도하신 것에 대해서는 빈번하게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성찬식을 집행하신 것에 대해서도 한 번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주셨다'는 말은 없다. 그것은 마치 우리에게 세례는 구원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4:3). 이것은 지극히 중대한 말이다. 시기심과 경쟁심을 품은 것이 주..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요 4:1-3). 그리스도의 공생애의 초기 무렵부터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의 가르침은 그들의 위선적인 행실을 공공연히 책망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리스도를 우두머리로 삼아 일어난 일어난 이 새로은 움직임 때문에 그들의 시기심은 야기되었다. 세례 요한은 성전에서 봉사해 온 제사장의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이것 때문에 요한은 존경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단지 목수..
본서 제7장의 종결부에서 우리는 성경의 어떤 한 구절과 다른 구절 사이의 관계에 주목함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지적했었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슬프게도 이 원칙을 무시해 왔다. 우리는 각각의 구절을 그 문맥에 비추어 조사해야 할 뿐만 아니라, 어떤 주제를 중심으로 하여 발췌한 각각의 구절들도 그 전후에 위치하는 전체의 구절들과의 관계에 비추어 연구해야 한다. 이 점에 주목함으로써 우리는 종종 성령께서 두 사건이 서로 어떤 대조를 이루기 때문에, 또는 대조를 지적해 주기 위하여 그 둘을(그런데 이 둘은 경우에 따라서 이적일 수도 있고 비유나 대화일 수도 있다) 나란히 배치해 두셨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고찰해 온 것 중 요한복음 2장의 전반부와 후반부에 들어 있는 내용은 분명히 이러한 예에 해당..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요 4:1-6). 우리는 우선 앞에서 해온 것처럼 앞으로 고찰하게 될 본문을 분석함으로써 시작하겠다. 본문은 다음과 같이 나누어 요약할 수 있다. 1. 시기하는 바리새인들의 마음을 아신 예수(1절)2. 세례를 베무는 주님의 제자들(2절)3.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신 주..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3:34).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의해 보내지셨으며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말하신다. 변화산에서의 아버지께서 그에게 이 사실에 대한 증언을 주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 17:5).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 보내신 다른 사자들과 다르시다. 그는 모든 점에서 '탁월하시다''. 다른 사람들은 성령을 '제한적으로' 받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단편적인 것들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령은 왔다가 다시 간다. 게다가 그들의 은사는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이런 은사를 받고, 다른 사람은 전혀 다른 은사를 받았다..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3:32). 요한의 이 말은 26절에서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라"라고 선언했던 유대인들에 대한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은가! 영적인 결과를 도표로 작성하고자 할 때의 통계적인 숫자는 참으로 믿을 수 없음이 여기에서 배워야 할 귀한 교훈이다.✒️ 저 유대인들은 외양만을 보았다. 그러므로 그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대의(大義)는 비범하게 번창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주님의 선구자는 참된 영적 결과에 있어서 그 이면에 숨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가 판결했던 것은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라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통계적인 숫자를 조심하라. 그것들은 주로 모여든 숫자에만 의존한다. 악관적인 사람들은 기쁘고 고무적인 모든 것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진지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