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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En Hakkor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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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부르짖는 자의 샘 (Judges 15:19)</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Tue, 9 Jun 2026 02:30:1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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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nagingEditor>En Hakkore</managing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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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En Hakkor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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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John 11] 그리스도, 영원한 말씀</title>
      <link>https://enoch822.tistory.com/3897</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 &quot;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quot;&lt;br&gt;&lt;br&gt; '그가' 즉 말씀이다. '태초에', 곧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이다. '하나님과 함께', 곧 '구별되는 인격성을 지니고' 이다. '계셨다', 곧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셨다.&lt;br&gt;&lt;br&gt; 여기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반복한 것은, 그리스도는 단지 영원부터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었던 개념 내지 가공적인 관념이었다는 초기 영지주의 이단을 부인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lt;br&gt;&lt;br&gt; 이 무서운 이단은 오늘날에도 다시 울려 퍼지고 있다. 하나님 안에 계셨다고 말해지지 않았다. 그는 영원리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lt;br&gt;&lt;br&gt;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우리 앞에 제시된 사항을 실제적으로 적용해 보고 아울러서 앞 장 끝부분에서 제기하였던 일곱 문항 중 두 번째 질문에 대답하고자 한다,&lt;br&gt;&lt;br&gt;어떻게 하면 하나님에 대한 좀 더 나은, 좀 더 깊고 온전한 지식에 이를수 있는가? 자연을 연구함으로써인가? 기도에 의해서? 성경을 공부함으로써? 아니면 어떠한 다른 방법으로써인가? 이보다 더 중요한 물음은 없을 것이다.&lt;br&gt;&lt;br&gt;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묻건대, 당신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그의 인격과 성품에 대하여 어떠한 개념을 갖고 있는가?&lt;br&gt;&lt;br&gt; 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살아 계신 참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세상에 없었다. 하나님이 자연 안에 계시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참되다. 그렇지만 그것은 제한을 요하는 진술이다.&lt;br&gt;&lt;br&gt; 자연은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계시한다. 그러나 그의 성품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는다. 자연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들, 곧 그의 능력, 지혜, 불변성 등을 나타내 준다.&lt;br&gt;&lt;br&gt; 그러나 그의 도덕적인 속성들, 다시 말해서 그의 공의, 거룩함, 은혜, 사랑에 대해서는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자연은 그 자체로서 아무런 자비도 알지 못하며, 아무런 사랑도 보여주지 않는다.&lt;br&gt;&lt;br&gt; 만일 눈먼 성도가 알지 못하면서 벼랑 끝을 걷고 있다면, 그는 마치 악한 살인자가 공격해 오는 것과 마찬가지의 운명에 처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자연의 법칙을 파괴한다면, 이내 아무리 후회한다 해도 그 징벌을 피할 수가 없다.&lt;br&gt;&lt;br&gt; 자연은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그를 숨기고 있다. 옛 사람들은 자기들 앞에 '자연'을 두었다. 그러니 그들이 하나님ㅇ 대해 무엇을 알았겠는가?&lt;br&gt;&lt;br&gt; 사도 바울이 고대의 학문과 문화의 중심 지역에서 보았던 저 제단이 답해 주는 바이다. 그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쓰여진 제단을 보았을 것이다.&lt;br&gt;&lt;br&gt; 하나님께서 온전히 알려지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뿐이다. 아멘아멘! 자연은 창조자의 손으로 지음받은 대로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은 재해 아래 놓여 있디. 그러니 불완전한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계시하는 완벽한 수단이 될 수 있겠는가?&lt;br&gt;&lt;br&gt;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는 하나님이시며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나타나셨다. 그는 참으로 완벽하게 하나님을 계시하셨다. 그는 &quot;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quot;(요 14:9)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lt;br&gt;&lt;br&gt; 그렇다면 여기에 우리의 대답이 있으며 실제적인 가치가 있다. 만일 믿는 자가 하나님에 대한 더 나은, 더 깊고 온전한 지식에 이르고자 한다면 그는 성경에 계시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기도하는 자세로 공부해야 한다. 아멘! &lt;br&gt;&lt;br&gt; 이 일을 우리의 중요한 업무, 커다란 기쁨으로 삼아야 한다. 성경의 장마다 나타나 있는 거룩한 구주의 탁월함에 대해 상세히 살펴보고 묵상해야 한다. ‍♂️&lt;br&gt;&lt;br&gt; 그렇게 할 때, 오직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는 &quot;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quot;(골 1:10) 될 것이다. &quot;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quot;은 오직 &quot;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quot;만 보여진다(고후 4:6).&lt;br&gt;&lt;br&gt; &quot;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quot;(1:3).&lt;br&gt;&lt;br&gt; 이 말씀은 또다시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신성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창조는 그에게서 기인한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창조하실 수 있다. 사람은 모든 자랑을 다하여도, 풀 한 포기 만들어 낼 수 없다.&lt;br&gt;&lt;br&gt; 이 구절에서 창조 전체가 말씀에서 기인되었다고 쓰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lt;br&gt;&lt;br&gt; &quot;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quot;&lt;br&gt;&lt;br&gt; 마일 그가 자기 자신을 창조하였다면 비록 그것이 가장 귀한 창조라 해도 이 말씀은 참되지 않다. 그러나 어떠한 것도 제외되지 않는다.&lt;br&gt;&lt;br&gt; 즉, &quot;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quot; 그가 만일 이전에 계셨던 그대로 그는 영원하시다. 마찬가지로 그는 만물의 창조자이셨다. 그럼으로써 그는 전능하시다.&lt;br&gt;&lt;br&gt;Arthur W. Pink 요한복음 강해 p24&lt;br&gt;&lt;br&gt;  &quot;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quot;(골 1:10).&lt;br&gt;&lt;br&gt;❤️‍  &quot;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quot;(고후 4:6).&lt;/p&gt;</description>
      <category>강해시리즈/요한복음 강해 (An Exposition of John)</category>
      <author>En Hakkor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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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8 Jun 2026 18:27:2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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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John 10] 그리스도, 영원한 말씀</title>
      <link>https://enoch822.tistory.com/3896</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quot;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quot;&lt;br&gt;&lt;br&gt; 이 '함께'라는 전치사는 두 가지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로, 말씀이 하나님의 면전에 계셨다는 것이다. &quot;에녹이 하나님과[함께] 동행하더니&quot;,&lt;br&gt;&lt;br&gt; 즉 그가 하나님의 친구로서 살았다고 읽는 대로이다. 요한복음 1:1의 '함께'라는 의미에 조명을 던져 주며, 영원부터 말씀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복되신 관계에 대해 계시해 주는 아름다운 구절이 잠언 8장에 있다.&lt;br&gt;&lt;br&gt; 이 구절은 '지혜'가 인격화되고 있는 8:22부터 시작된다. 그 구절은 세상에 존재하기 전부터 말씀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복된 관계에 대해 말해 주고 있다. 8:30에서 이 같은 말씀을 읽을 수 있다.&lt;br&gt;&lt;br&gt; &quot;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quot;&lt;br&gt;&lt;br&gt; 이와 같은 뜻에 덧붙여 우리가 설명할 수 있거니와 여기에서 '함께'로 번역된 헬라어 전치사 '프로스'(pros)는 때때로 '향하여' 라는 의미로 쓰여졌으며, 대개의 경우에는 '~에게' 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었다.&lt;br&gt;&lt;br&gt; 말씀이 하나님께 가까이 향하여, 혹은 하나님께 있었다. 어떤 사함이 의미 있는 말을 한 적이 있다. &quot;'함께' 라고 쓰여진 말은 다시 말해 분질적인 연합 안에서의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영적인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quot;&lt;br&gt;&lt;br&gt; 여기에서 &quot;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quot;라고 한 것은 그의 독자적인 인격성을 말한 것이다. 즉 그는 하나님 '안에' 계셨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이 점에 있어 성경의 놀랄 만한 정확성에 주목해야 한다.&lt;br&gt;&lt;br&gt; 우리가 혹 그렇게 생각할 수 있거니와 &quot;말씀이 아버지와 함꼐 계셨다&quot;고 말해진 것이 아니라 &quot;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quot;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 이라는 호칭은 삼위의 세 위격에 있어 공통적인 것이다.&lt;br&gt;&lt;br&gt; 반면에 '아버지'는 오직 첫 번째 위격에만 해당되는 특별한 칭호이다. 만일 &quot;말씀이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quot;라고 하였으면 성령은 제외되는 것이디. 그러나 성ㅂ와 성령과 함께 영원한 교제 안에 거하고 있으므로 '하나님과 함께' 라고 쓰이게 되었다.&lt;br&gt;&lt;br&gt; 또한 이 구절이 &quot;하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quot; 라고 표현되지 않았음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신격 안에 복수의 위격이 있게 되거니와,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quot;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quot;라고 말한 것이 엄밀하게 정확하다.&lt;br&gt;&lt;br&gt; &quot;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quot;&lt;br&gt;&lt;br&gt; 혹은 문자 그대로 &quot;하나님께서 곧 말씀이시니라&quot; 이다. '말씀'이라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의 거룩한 영광에 대해 부정확한 개념을 갖게 되지 않도록 성령은 계속하여 말씀하고 계신다.&lt;br&gt;&lt;br&gt; &quot;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quot;&lt;br&gt;&lt;br&gt; 이는 그의 독자적인 인격성을 나타내 주며, 신격에 대한 그의 본질적인 관계를 암시해 준다. 그리고 비록 충분히 강한 표현으로는 아니지만 성령께서는 분명하게 덧붙이고 계신다.&lt;br&gt;&lt;br&gt; &quot;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quot;&lt;br&gt;&lt;br&gt; 누가 하나님께서 곧 하나님 자신이신 그분을 구원하셨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말씀은 계시자이실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하셨던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신성에 대해 이보다 더 단호한 표현은 생각할 수 없다.&lt;br&gt;&lt;br&gt;Arthur W. Pink 요한복음 강해 p23&lt;/p&gt;</description>
      <category>강해시리즈/요한복음 강해 (An Exposition of John)</category>
      <author>En Hakkor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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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8 Jun 2026 18:26:5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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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John 9] 그리스도, 영원한 말씀</title>
      <link>https://enoch822.tistory.com/3895</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quot;말씀이 계시니라.&quot;&lt;br&gt;&lt;br&gt; 이 언급은 삼위의 제2위격, 즉 성자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왜 주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으로 일컬어지고 있는가? 이 명칭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lt;br&gt;&lt;br&gt; 이 물음에 조명을 던져 주며 우리의 마음 가운데 떠오르는 첫 구절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신의 도입 부분이다.&lt;br&gt;&lt;br&gt; &quot;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quot;&lt;br&gt;&lt;br&gt;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 하나님의 마지막 대언자이심을 알 수 있다. 이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구주에 대한 칭호가 요한계시록 1:8에서 나온다 - &quot;나는 알파와 오메가라.&quot;&lt;br&gt;&lt;br&gt; 이는, 곧 그가 하나님의 알파벳, 신성을 설명하시는 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모든 것에 대하여 알리시는 분임을 암시한다. 아마도 요한복음 1:18의 증언을 보면 좀 더 분명해질 것이다.&lt;br&gt;&lt;br&gt; &quot;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quot; '나타내셨다'는 말은 사도행전 15:14; 21:19에 쓰여진 바와 같이 고하였다는 의미이다.&lt;br&gt;&lt;br&gt; 누가복음 24:35에서는 '말하다'로 기록되어 있다. 이 세 구절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대언자시라는 것, 신성을 말씀하신 분이며 아버지를 선포하고 알리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lt;br&gt;&lt;br&gt;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분이다. 요한복음 1:1에서 보여지는 바 그에 대한 이 명칭의 의미는 성경에 대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이라는 이름과 비교해 봄으로써 명확해질 수 있다.&lt;br&gt;&lt;br&gt; 성경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다음과 같다. 즉 성경은 하나님의 생각을 계시하는 것이며, 그의 뜻을 표현하는 것이고, 그의 속성을 알리는 것인 동시에 그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lt;br&gt;&lt;br&gt; 이것이 바로 주 예수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하신 일이다. 그렇지만 좀 더 상세히 살펴보기로 하자.&lt;br&gt;&lt;br&gt; 1. '말씀'은 표명의 수단이다. &lt;br&gt;&lt;br&gt; 말을 수단으로 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알릴 바를 전한다. 말로써 우리는 자기 자신을 표현하며 뜻을 알리고 지식을 전한다. 마찬가지러 말씀으로써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우리에게 전해 주는 하나님의 전달자이시다.&lt;br&gt;&lt;br&gt; 2. '말씀'은 계시의 방법이다.☄️&lt;br&gt;&lt;br&gt; 이야기하는 사람은 말을 통하여 자신의 지적인 능력과 도덕적 성품을 드러내게 된다. 말에 의해서 우리는 옳다고 여김받을 수 있으며, 말로 인해서 비난받을 수 있다. 그리고 말씀으로써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속성과 완전성을 드러내 보이신 것이다.&lt;br&gt;&lt;br&gt;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참으로 온젆 계시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셨고 그의 지혜를 표명하셨다. 그의 거룩함을 드러내셨고, 그의 은혜를 알리셨으며, 그의 마음을 보여주셨다. 다른 어떠한 곳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온전히, 종국적으로 알려지신 바 되었다.&lt;br&gt;&lt;br&gt;Arthur W. Pink 요한복음 강해 p22&lt;/p&gt;</description>
      <category>강해시리즈/요한복음 강해 (An Exposition of John)</category>
      <author>En Hakkor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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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8 Jun 2026 18:13:3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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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John 8] 그리스도, 영원한 말씀</title>
      <link>https://enoch822.tistory.com/3894</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quot;태초에&quot;, 곧 '시작에'이다. '태초'란 무엇을 말하는가? 신약 성경에서는 '시작'이라는 의미의 말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lt;br&gt;&lt;br&gt; 세상의 '시작' 곧 '창세'가 있으며(마 24:2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 있다(막 1:1). '재난'의 '시작'이 있으며(막 13:8), '첫표적', 곧 표적(혹은 이적)의 '시작'이 있다(요 2:11).&lt;br&gt;&lt;br&gt; 그렇지만 요한복음 1:1에서 언급된 '시작'. 즉 '태초'는 명백히 모든 다른 '시작들'보다 앞선 것이다. 요한복음 1:1에서 언급된 '시작'은 1:3의 '만물' 을 지음에 선행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창조의 시작이요, 시간의 시작이다.&lt;br&gt;&lt;br&gt; 우리가 사는 지구는 오래 전에 만들어졌다.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아마도 수백만 년능 족히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은 그 모든 것, 만물보다 먼저 계셨다. 그는 태초부터 계셨을 뿐만 아니라 '태초에' 계셨다.&lt;br&gt;&lt;br&gt; '태초에.'&lt;br&gt;&lt;br&gt;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멀리까지 나아가게 한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모든 창조 이전에 계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quot;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기&quot; 때문이다.&lt;br&gt;&lt;br&gt; 만일 그가 '태초에' 계셨다면, 그 자신은 시작됨이 없이 스스로 계셨다. 이렇게 할하는 것은 &quot;그는 영원히 계신 분이다&quot;라는 말을 소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완벽한 일치를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그분의 기도에서 본다.&lt;br&gt;&lt;br&gt;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quot;아버지와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quot; 그러므로 말씀은 '태초에' 계셨다. 그리고 만일 태초에 계셨다면 그는 영원한 존재이시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 그분만이 영원하시므로 주 예수의 절대적인 신성은 확고하게 세워지게 된다. 아멘!&lt;br&gt;&lt;br&gt; &quot;말씀이 계시니라.&quot;&lt;br&gt;&lt;br&gt; 이 구절에서 '계시니라' 라고 쓰여진 원래의 헬라어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하나는 존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1:3에서 사용된 것은 이 후자의 의미(에게네토, egeneto)이다.&lt;br&gt;&lt;br&gt; 문자 그대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곧 &quot;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존재하게 된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quot; 그리고 또다시 1:6에서 우리는 이 'egoneto' 라는 단어를 보게 된다.&lt;br&gt;&lt;br&gt; &quot;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있게 되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quot; 이 같은 말은 1:14에서도 보인다. &quot;말씀이 육신이 되었다&quot;(육신으로 있게 되었다). 그러나 1:1, 2에서는 &quot;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quot;[이토(ito)의 의미]로 쓰여졌다.&lt;br&gt;&lt;br&gt; 이는 말씀이신 그분은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즉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영원으로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여기에서 원래의 헬라어 'ito'라는 말을 사용하게 하셨음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lt;br&gt;&lt;br&gt; 요한복음 1장의 처음 두절에서 네 번씩이나 사용된 이 말은 아들이 개인적으로 존재하셨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람으로 난(egeneto) 세례 요한과는 달리 '말씀'은 시간이 시작되기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ito), 즉 존재하셨다.&lt;br&gt;&lt;br&gt;Arthur W. Pink 요한복음 강해 p20&lt;br&gt;&lt;br&gt;☄️&quot;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quot;(마 24:21).&lt;br&gt;&lt;br&gt;✍️ &quot;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quot;(막 1:1).&lt;br&gt;&lt;br&gt;☄️ &quot;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quot;(막 13:8).&lt;/p&gt;</description>
      <category>강해시리즈/요한복음 강해 (An Exposition of John)</category>
      <author>En Hakkor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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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6 Jun 2026 17:27:08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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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John 7] 그리스도, 영원한 말씀</title>
      <link>https://enoch822.tistory.com/3893</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그리스도, 영원한 말씀&lt;br&gt;&lt;br&gt; &quot;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quot;(요 1:1-13).&lt;br&gt;&lt;br&gt; 앞장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하였었다.&lt;br&gt;&lt;br&gt; &quot;성경의 각 권은 나름대로 특별하게 강조되는 주제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신체를 이루는 지체들이 각각 특유한 기능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의 각 권들도 그 나름대로 특별한 목적과 임무를 지니는 것이다.&lt;br&gt;&lt;br&gt; 요한복음의 주제는 구세주의 신성이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그리스도의 신격이 그처럼 온전하게 제시되는 곳은 없다. 넷째 복음서에서 두드러지게 강조되는 점은 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점이다.&lt;br&gt;&lt;br&gt; 천사들이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 탄생을 알린 그분, 이 땅에서 33년 동인 지내셨던 그분,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던 그분, 40일 후에 이 지상에서 떠나셨던 그분이 바로 영광의 주이셨음을 이 복음서를 통해 보게 된다.&lt;br&gt;&lt;br&gt; 이에 대한 증거가 전편의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다. 그에 대해 깊이 묵상해 볼 때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딛 2:13)께 경배 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quot; 아멘아멘!!&lt;br&gt;&lt;br&gt; 요한복음이 구세주의 신성을 데시하고 있음은 이 복음서 제1장, 첫 머리의 말씀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성령은 말하자면 출입구로 들어가는 올바른 열쇠라고 할 수 있다. &lt;br&gt;&lt;br&gt; 이 네 번째 복음서의 도입 구절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동시에 그의 본래적인 영광을 계시하고 있기 때문이다.&lt;br&gt;&lt;br&gt; 이 의미 깊은 구절들에 대한 해설을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그 내용에 대해 분석해 보고자 한다. 요한복음 1장의 처음 열세 절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lt;br&gt;&lt;br&gt;1. 그리스도와 시간의 관계 - &quot;태초에&quot;, 곧 영원전부터(1:1)&lt;br&gt;2.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 - &quot;하나님과 함께&quot;, 곧 거룩한 삼위 중의 한 분(1:1)&lt;br&gt;3. 그리스도와 삼위의 관계 - &quot;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quot;, 곧 계시자(1:1)&lt;br&gt;4. 그리스도와 우주의 관계 - &quot;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quot;, 곧 창조자(1:3)&lt;br&gt;5. 그리스도와 사람들의 관계 - 그들의 &quot;빛&quot;(1:4, 5)&lt;br&gt;6.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의 관계 - 그의 신성에 대한 &quot;증언자&quot;(1:6-9)&lt;br&gt;7.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받으신 대우(1:10-13)&lt;br&gt;(1)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1:10)&lt;br&gt;(2) 자기 백성(이스라엘)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1:11)&lt;br&gt;(3)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 그를 영접하였다(1:12, 13)&lt;br&gt;&lt;br&gt; &quot;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quot;(요 1:1-3).&lt;br&gt;&lt;br&gt; 이 말씀은 다른 세 복음서의 도입 구절과 참으로 다르다. 요한은 다윗의 자손이나 사람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직접적으로 그리스도를 제시함으로써 서두를 시작하고 있다.&lt;br&gt;&lt;br&gt; 요한은 우리로 하여금 태초로 되돌아가게 하며 주 예수는 시작이 없으신 분임을 보여주고 있다. 요한은 창조의 이면을 캐며, 구주께서 곧 창조주 그분이심을 보여준다. 이 말씀의 구절 구절이 우리의 깊은 주의와 경건한 관심을 요한다.&lt;br&gt;&lt;br&gt; &quot;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quot;&lt;br&gt;&lt;br&gt; 이 구절에서 우리는 유한한 사고를 뛰어넘는 영역에 들어서게 된다. 여기에서 사색 내지 추측은 신성 모독이다. '태초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인간의 사고 수준에서 나오는 영감을 완전히 압도하는 것이다. &lt;br&gt;&lt;br&gt; &quot;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quot;&lt;br&gt;&lt;br&gt; 마찬가지로 우리는 '말씀'이란 표현 역시 파악할 수가 없다. 곧 말에 의해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명확히 표현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란 들을 수 있는 말로 자신을 표현하는 신성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말할 때, 진정 우리는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lt;br&gt;&lt;br&gt; &quot;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quot;&lt;br&gt;&lt;br&gt; 이 구절은 그의 독자적인 인격성을 암시하며 복되신 삼위의 다른 위격들에 대한 그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서글프게도 우리는 신격의 세 위격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묵상하기에는 너무도 무능력한 존재들이다.&lt;br&gt;&lt;br&gt; &quot;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quot;&lt;br&gt;&lt;br&gt;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시자이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항상 하나님 그분 자신이셨고, 영원히 그러하시다. 아멘아멘! 우리 구주께서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그 자신을 표현하셨던 신성, 그를 통하여, 그에 의하여 오신 분이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성부와 성령과 동등하신 신성 그 자체이셨다. 아멘!&lt;br&gt;&lt;br&gt; 이제 우리는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 절들을 좀 더 자세히 고찰해 보고자 할 때 참으로 간절히 그의 자비와 은혜를 구해야 한다. ‍♂️&lt;br&gt;&lt;br&gt; &quot;하나님 우리 아버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당신의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것들을 취하사 우리에게 보여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옵소서. 아멘&quot;&lt;br&gt;&lt;br&gt;Arthur W. Pink 요한복음 강해 p19&lt;br&gt;&lt;br&gt;&lt;/p&gt;</description>
      <category>강해시리즈/요한복음 강해 (An Exposition of John)</category>
      <author>En Hakkor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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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6 Jun 2026 17:26:3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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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John 6] 서론 1</title>
      <link>https://enoch822.tistory.com/3892</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필자는 이 장을 시종일관 여러분이 앞으로 계속 될 강해에 대해 준비되기 바라는 마음으로 써왔다.&lt;br&gt;&lt;br&gt; 다음 장에서 우리는 요한복음 첫 장의 도입 부분을 다루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이 말씀을 주제로 열심히 기도하며 공부하고 묵상했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간절한 바람이다.&lt;br&gt;&lt;br&gt; 말씀을 듣는 사람의 편에서 부지런히 연구해야 할 것을 대신 하는 성경 교사는 방해자이지 조력자가 아니다. 교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스스로 성경을 탐구하게 만드는 것이다.&lt;br&gt;&lt;br&gt; 그들의 관심을 거룩한 말씀 안에서 고무시키고, 그 길로 나아가는 방법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고려해 볼 때, 다음 장에서 다를 구절들에 관해 각 장의 맨 끝에 일련의 질문들을 만들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듯싶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lt;br&gt;&lt;br&gt; 아래에 우리가 다음 장에서 다룰 구절에 대한 일곱 개의 문제가 있다. 여러분은 요한복음의 처음 열세 절을 공부하기 바란다. 그리고 다음 질문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lt;br&gt;&lt;br&gt;1. 요한복음 1:1에 언급된 '태초'란 무엇인가?&lt;br&gt;&lt;br&gt;2. 어떻게 하면 하나님에 대한 좀 더 나은, 좀 더 깊고 온전한 지식에 이를 수 있을까? 자연을 연구함으로써인가? 기도에 의해서? 성경을 공부함으로써? 아니면&amp;nbsp;&amp;nbsp;어떠한 다른 방법으로써인가?&lt;br&gt;&lt;br&gt;3. 왜 예수는 여기에서 '말씀'으로 불려지고 있는가? 이 명칭의 정확한 뜻과 의미는 무엇인가?&lt;br&gt;&lt;br&gt;4. 요한복음 1:4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 이 &quot;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quot;&lt;br&gt;&lt;br&gt;5. 구주께서 1:7에서 '빛'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lt;br&gt;&lt;br&gt;6. 요한복음 1:12은 죄인이 구원받기 위하여 해야 할 바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lt;br&gt;&lt;br&gt;7. 요한복음 1:13에 있는 각각의 말들이 의미하는 바는 정확히 무엇인가?&lt;br&gt;&lt;br&gt; 이 각각의 질문에 대하여 거듭 기도하고 묵상하라. 특히 하나님의 응답을 알기 위하여 &quot;성경을 샅샅이 탐색하라.&quot; &lt;br&gt;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요한복음 1:1-13에 대한 강해인 다음 장에 있다.&lt;br&gt;&lt;br&gt;Arthur W. Pink 요한복음 강해 p16&lt;/p&gt;</description>
      <category>강해시리즈/요한복음 강해 (An Exposition of John)</category>
      <author>En Hakkor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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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6 Jun 2026 17:26:0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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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John 5] 서론 1</title>
      <link>https://enoch822.tistory.com/3891</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넷째로, 요한복음 11:49-52에서 이러한 말씀을 읽게 된다.&lt;br&gt;&lt;br&gt; &quot;그 중의 한 사람 그 해 데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말함이러라.&quot;&lt;br&gt;&lt;br&gt; 이것은 탁월한 예언이었으며 가야바 자신이 의식한 것보다 훨씬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것은 구주의 죽음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를 알린 것이었으며, 그 영역 안에 이방인 가운데서 믿지 않는 죄인들을 포함시킨 것이었다.&lt;br&gt;&lt;br&gt;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 있는 택함받은 자들이었다. 그들이 여전히 '흩어져' 있는 동안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불려진 것은 &quot;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quot;라는 말씀과 나란히 우리에게 하나님의 관점을 제시해 준다.&lt;br&gt;&lt;br&gt; 그러나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이 이방인들 가운데 있는 믿는 자들이 '모여 하나가 되었다'는 선언이다. 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앞에서 이미 말하였던 것처럼, 몸은 요한이 기술한 말씀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았다) 한 가족,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이다.&lt;br&gt;&lt;br&gt; 다섯째로, 요한복음 14:2, 3에서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셨다.&lt;br&gt;&lt;br&gt; &quot;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quot;❤️‍ &lt;br&gt;&lt;br&gt; 이것은 거의 지적할 필요도 없거니와 다른 세 복음서에서 보여지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인자'의 다시 오심에 대해 별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lt;br&gt;&lt;br&gt; 그러나 이 복음서에서 그것은, 하늘나라에 대한 성도들의 환희이며,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분명하게 언급하신 곳으로 그들을 데려가는 것이다. 그리고 명백히 이 일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결코 유대인 가운데 믿는 자들에게만 제한될 수가 없다.&lt;br&gt;&lt;br&gt; 여섯째로, 이 점에 대해 길게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 복음서에서 성령이 믿는 자들과 지속하시는 관계는 앞의 세 복음서에서 제시된 것과는 완전히 다름을 인식해야만 한다.&lt;br&gt;&lt;br&gt; 오직 이 복음서에서만 &quot;성령으로 나는&quot;(3:5) 것에 대하여 읽을 수 있다. 오직 이 곳에서만 성령께서 그들의 &quot;보혜사요 대언자&quot;(14:16)로 칭해지셨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오직 여기에서만 믿는 자들과 &quot;영원토록 함께&quot;(14:16) 계신 그분에 대해 읽을 수 있다.&lt;br&gt;&lt;br&gt; 일곱째로, 다른 복음서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되어 있는 구주의 제사장적 기도는 분명히 믿는 유대인들 이상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복음서가 갖는 한층 범위를 증거해 준다.&lt;br&gt;&lt;br&gt; 여기에서 구주는 이렇게 말씀하신다.&lt;br&gt;&lt;br&gt; &quot;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오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quot;&lt;br&gt;&lt;br&gt; &quot;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quot;이란 곧 하나님의 전 가족 안에서 택해진다. 또한 20절에서 주 예수는 말씀하신다. &quot;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quot;&lt;br&gt;&lt;br&gt; 이 말씀에서 '이 사람들' 이란 곧 유대인 가운데 믿는 자들을 가리킨이 분명하다. 그리고 '믿는 사람들도'란 이방인 가운데 믿는 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lt;br&gt;&lt;br&gt; 끝으로, 22절에 있는 &quot;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quot; 라는 그의 말씀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전 가족이 그의 대상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lt;br&gt;&lt;br&gt;Arthur W. Pink 요한복음 강해 p15&lt;/p&gt;</description>
      <category>강해시리즈/요한복음 강해 (An Exposition of John)</category>
      <author>En Hakkor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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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6 Jun 2026 17:25:4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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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John 4] 서론 1</title>
      <link>https://enoch822.tistory.com/3890</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여러분 중에는 아마도 극단적인 세대주의적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 복음서의 범위와 진정한 세대주의적인 의미를 정의하는 데 도움이 되는 다른 관점에 주의를 기울여 보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한다.&lt;br&gt;&lt;br&gt; 요한복음과 공관복음 사이에 아무런 구분도 두지 않는 사람들, 이 네 번째 복음서가 전적으로 유대인적인 것이고 현 세대의 신자들에게 적용하기에는 다소 거리감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분명코 확신하건대, 이러한 주장은 심각한 오류이다.&lt;br&gt;&lt;br&gt; 요한이 쓴 복음서는 그의 서신서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가족에 관한 것이다. 이에 대한 증거로서 여러분은 다음 사항들에 대해 주의 깊게 고려해 볼 수 있다. &lt;br&gt;&lt;br&gt; 첫째로, 1:11-13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는다.&lt;br&gt;&lt;br&gt; &quot;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형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quot;&lt;br&gt;&lt;br&gt; 첫째로, 민족으로서 유대인들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 둘째로, 어떤 자들은 그를 '영접하였다'. 곧 '그 이름을 믿었다.&lt;br&gt;&lt;br&gt; 셋째로, 이 말씀으로 보아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로 정해졌다. 곧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다. 어떤 방법으로든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와 비슷한 것을 찾아볼 수 없다.&lt;br&gt;&lt;br&gt; 이 복음서에 있는 바로 이 사항만이 우리 앞에 제시된 신생(new birth)의 진리이다. 그리고 그 신생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된다. &lt;br&gt;&lt;br&gt; 그러므로 믿는 유대인들을 넘어서서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가족으로 취함받게 되었으므로 우리는 요한복음이 열 두 지파 사람들에게만 국한될 수 없음을 승인하게 된다. 아멘!&lt;br&gt;&lt;br&gt; 둘째로,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기술한 후에 이렇게 쓰고 있다. &quot;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오직 믿는 자들만이 보는 영광이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quot;&lt;br&gt;&lt;br&gt; 그리고 이어서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언을 요약한 다음, 성령께서는 복음서 기자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계속하여 말씀하신다. &quot;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quot;&lt;br&gt;&lt;br&gt; 분명코 이 한 절은 이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의 요지를 확실히 하고 있다. 유대 민족은 결코 '그의 충만한 데서' 받지 않았다. 이 같은 말씀은 오직 믿는 자들의 속성을 단언한다. 16절의 '우리가 다'는 그를 받은 '자마다 모두'이다. 그들에게 12절의 '하나님의 자녀'다 되는 권세를 주신 것이다.&lt;br&gt;&lt;br&gt; 셋째로, 요한복음 10장에서 구주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읽을 수 있다. &quot;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quot;(14, 15절).&lt;br&gt;&lt;br&gt; 바로 다음 절에서 그는 계속하여 말씀하신다. &quot;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quot;(16절).&lt;br&gt;&lt;br&gt; 이 '다른 양들'이란 누구인가? 이에 답할 수 있으려면 먼저 그리스도께서 이 장 15절에서 말씀하신 '양'은 누구인지 알아야만 한다. 이에 대해 오직 한 대답만이 가능하다. 즉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말하지 않는다.&lt;br&gt;&lt;br&gt; 왜냐하면 그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 '양'이란 그를 '영접한' 적은 무리들이었다. 곧 '그 이름을 믿는자들' 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미래의 믿는 자들의 무리에 대해 계속하여 말씀하신다.&lt;br&gt;&lt;br&gt; &quot;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라고 말해지고 있다, 롬 4:17)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quot;. 분명코 구주께서 거기에서 말씀하신 바 그 때에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 이란 이방인들 가운데 믿는 자들이었다.&lt;br&gt;&lt;br&gt; 그리고 이들은 유대인 가운데 믿는 자들과 함께 '한 무리'가 되어야만 한다. 즉, 똑같이 한 가족,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야만 한다.&lt;br&gt;&lt;br&gt;Arthur W. Pink 요한복음 강해 p14&lt;/p&gt;</description>
      <category>강해시리즈/요한복음 강해 (An Exposition of John)</category>
      <author>En Hakkore</author>
      <guid isPermaLink="true">https://enoch822.tistory.com/3890</guid>
      <comments>https://enoch822.tistory.com/3890#entry3890comment</comments>
      <pubDate>Fri, 5 Jun 2026 15:31:3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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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John 3] 서론 1</title>
      <link>https://enoch822.tistory.com/3889</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여기에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는 자세로 관심을 가질 만한 주제가 있다. 만일 성령께서 주님의 인성의 완전성을 지키기 위해 그토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면 - 가령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말씀에서 보여진다. &lt;br&gt;&lt;br&gt; &quot;나실 바 거룩한 자&quot;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으셨다&quot; 등 - 마찬가지로 성경을 기록하도록 영감받은 자들도 또한 우리 구주가 하나님의 아들임에 틀림없음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lt;br&gt;&lt;br&gt;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이 앞으로 올 그분이 완벽한 인간임을 알렸던 것처럼, 구세주에 대한 예언은 그분이 인간 이상의 존재라는 명백한 암시를 주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이렇게 예언하셨다.&lt;br&gt;&lt;br&gt; &quot;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quot;(사 9:6). &lt;br&gt;&lt;br&gt; 그리고 미가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하셨다. &quot;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quot;(미 5:2).&lt;br&gt;&lt;br&gt; 스가랴를 통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quot;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아지려니와&quot;(슥 13:7).&lt;br&gt;&lt;br&gt; 또한 시편 기자를 통하여 이같이 선포하신바 있다. &quot;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quot;(시 110:1).&lt;br&gt;&lt;br&gt; 그리고 재림에 대해 앙망할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quot;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 신앙의 형태가 여러 유형으로 나뉘어져 있는 오늘날에는 주 예수께서 사실을 아주 강하게 그리고 빈번히 강조할 수가 없게 되었다.&lt;br&gt;&lt;br&gt; 이 넷째 복음서의 특별한 주제와 관련해서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영광이 완전히 드러난 것을 보게 된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태초부터, 만물이 지은 바 되기 전부터(1:2를 보라) 그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음을 보게 된다.&lt;br&gt;&lt;br&gt; 이 말씀을 통하여 &quot;아버지의 독생자와 은혜와 진리가 충만&quot;(1:14)하도록 예정되었음을 알게 된다. 이 말씀을 통하여 세례 요한이 &quot;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quot;(1:34)을 증언하였다는 것을 읽게 된다.&lt;br&gt;&lt;br&gt; &quot;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냈을&quot;(2:11)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이 말씀(요한복음서)에서이다. 구주께서 &quot;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quot;(2:19)라고 말하셨음을 읽게 되는 것도 여기에서이다. &quot;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quot;(3:35)도 이 말씀을 통해서 안다. &lt;br&gt;&lt;br&gt; 그리스도께서 &quot;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quot;(5:21-23)고 말씀하심을 보게 되는 것도 이 복음서에서이다.&lt;br&gt;&lt;br&gt; 또한 여기서 우리가 그가 &quot;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quot;(8:58)고 단언하고 계심을 보게 되나. 이 복음서를 통하여&amp;nbsp;&amp;nbsp;그가 &quot;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quot;(10:30)라고 확언하셨음을 알 수 있다.&lt;br&gt;&lt;br&gt; 이 복음서를 통하여 그가 &quot;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quot;(10:30)라고 확언하셨음을 확언하셨음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에서 그가 &quot;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quot;(14:9)고 증언하셨음을 알 수 있다.&lt;br&gt;&lt;br&gt; 요한복음을 상세히 살펴보기에 앞서 이 복음서의 관점에 관해 몇 마디 말해 둘 것이 있다. 먼저 이 복음서가 다른 세 복음서들과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분먕하게 해두어야겠다.&lt;br&gt;&lt;br&gt; 다른 복음서에서 그리스도는 인간적인 관계에서 그려져서 세상 사람들과 연관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늘의 백성들과 연관되어 있다.&lt;br&gt;&lt;br&gt; '몸'의 신비가 이 복음서에 나타나 있지 않음은 사실이다(그것에 대하여는 단지 사도 바울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았을 때 쓴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이 복음서에서 고려된 것은 오히려 가족적인 유대관계이다.&lt;br&gt;&lt;br&gt; 즉 하나님의 자녀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이다. 또한 '하늘의 부르심' 역시 여기에 충분히 표명되어 있지 않음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에 대해 명백히 암시하고 있다.&lt;br&gt;&lt;br&gt; 이 말씀(요한복음)에 대해 주의 깊게 연구해 볼 때 그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앞의 세 복음서에서 그리스도는 유대인들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lt;br&gt;&lt;br&gt; 메시야의 왕국을 선언하고 있으나, 그 선언은 그 백성이 그를 거부하였음이 자명해지자 곧 중지되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그는 처음부터 거부당하고 있다. 맨 첫 장에서 우리는 &quot;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quot;라는 말씀을 일게 된다.&lt;br&gt;&lt;br&gt; 그러므로 다른 세 복음서에서 보여지는 바 많은 것들과 관련되어 갖는 제한점들을 요한복음은 갖지 않는다. 또한 요한복음에서 구세주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표명되고 있으며, 그러한 존재로서는 오직 믿는 자들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lt;br&gt;&lt;br&gt; 그러므로 이 점에 있어 유대인은 아무런 특혜도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관해 유대인이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그가 '다윗의 자손'이었다는 사실에서 시작되는) 순전히 육적인 존재였다. 반면에 믿는 자들은 영적인 결합에 의하여 하나님의 아들과 관련되는 것이다.&lt;br&gt;&lt;br&gt;Arthur W. Pink 요한복음 강해 p12&lt;/p&gt;</description>
      <category>강해시리즈/요한복음 강해 (An Exposition of John)</category>
      <author>En Hakkor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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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5 Jun 2026 15:30:3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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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John 2] 서론 1</title>
      <link>https://enoch822.tistory.com/3888</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제 1 장 서론&lt;br&gt;&lt;br&gt; 이 책에서 넷째 복음서의 말씀을 한 구절 한 구절 해석해 나가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그러나 제1장의 첫머리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요한복음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lt;br&gt;&lt;br&gt; 이렇게 함으로써 요한복음의 관점과 그 중심 되는 주제, 그리고 다른 세 복음서들과의 연관관계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복음서를 쓴 요한은 어떠한 사람인가, 그는 어디에서 이것을 썼는가, 혹은 이것이 어느 시기에 쓰여졌는지와 같은 문제에 대한 토론에 들어감으로써 여러분들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lt;br&gt;&lt;br&gt; 이러한 문제들은 학문적인 연구의 관심 대상일 것이며, 영혼에 양식을 제공하는 것도, 또한 성경의 이 부분을 이해하는 데 어떠한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영혼에 약식을 제공하고, 성경을 이해하는 일이야말로 바로 우리가 바라는 두 가지 중요한 것이다.&lt;br&gt;&lt;br&gt; 하나님께서 우리로 가르침 받을 수 있도록 그의 거룩한 말씀 중 이 부분에 기록하신 뜻을 알게 하는 방법으로 성경 말씀을 펼쳐 보이는 것, 그리고 믿음의 권속들을 교화하는 것이 이 강해서의 목적이다.&lt;br&gt;&lt;br&gt; 사복음서들은 구세주의 지상 생활에 대하여&amp;nbsp;&amp;nbsp;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복음서는 완전히 다른 성격으로 주님을 묘사하고 있다.&lt;br&gt;&lt;br&gt; 마태는 주 예수를 다윗의 자손, 이스라엘의 왕위의 계승자, 유대인의 왕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가 쓴 복음서의 모든 내용은 이것을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lt;br&gt;&lt;br&gt; 마가복음에서 그리스도는 야호와의 종, 하나님의 온전한 일꾼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 복음서의 모든 내용은 그의 사역의 성격, 그의 일한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lt;br&gt;&lt;br&gt; 누가는 구세주의 인성을 다루고 있으며 그를 죄 많은 인간과 대조되는 온전한 인간으로 제시하고 있다.&lt;br&gt;&lt;br&gt; 네번째 복음서는 그를 지상에 내려오신 거룩한 분,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들 사이에 잠시 거하시는 아버지의 영원한 아들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시종일관 변함없이 전개되는 주된 진리이다.&lt;br&gt;&lt;br&gt; 이 네 번째 복음서를 읽을 때 우리는 다른 세 복음서에 기록된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배경에 접하게 된다. 이 복음서가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과 같은 시기에 기록되었다는 것, 그리고 '공관복음서' 에 나와 있는 사건들이 여기서도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lt;br&gt;&lt;br&gt; 또한 앞의 세 복음서의 구심점이 되는 바로 그분이, 요한이 쓴 복음서에서도 핵심적인 위치에 있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모든 것이 완전히 새롭다.&lt;br&gt;&lt;br&gt; 이 네 번째 복음서는 다른 복음서들보다도 좀 더 높은 관점을 취하고 있다. 그 내용은 인간적인 맥락보다는 영적인 관계를 고려하고 있다. 그리고 한층 높은 영광들이 구세주의 비길 바 없는 인격에 상응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lt;br&gt;&lt;br&gt; 앞의 세 복음서에서 그리스도는 인간적인 관계에서 고려되었다. 그러나 요한복음서에서는 그렇지 않다.&lt;br&gt;&lt;br&gt; 이 네 번째 복음서의 취지는 말구유에서 태어나 후에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분이 왕보다도 더 높은 영광을 가지셨다는 것, 스스로를 낮추사 종의 자리를 취하신 그분이 전에는 '하나님돠 동등한' 분이셨다는 것,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된 그분이 다름 아닌 아버지의 독생자이셨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아멘!!&lt;br&gt;&lt;br&gt; 성경의 각 권은 나름대로 특별하게 강조되는 주제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신체를 이루는 지체들이 각각 특유한 기능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의 각 권들도 그 나름대로 특별한 목적과 임무를 지니는 것이다.&lt;br&gt;&lt;br&gt; 요한복음의 주제는 구세주의 신성이다❤️‍ .&amp;nbsp;&amp;nbsp;성경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도의 신격이 그처럼 온전하게 제시되는 곳은 없다. 넷째 복음서에서 두드러지게 강조되는 점은 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점이다.&lt;br&gt;&lt;br&gt; 천사들이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 탄생을 알린 그분, 이 땅에서 33년 동안 지내셨던 그분,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던 그분, 40일 후에 이 지상에서 떠나셨던 그분이 바로 영광의 주이셨음을 이 복음서를 통해 보게 된다.&lt;br&gt;&lt;br&gt; 이에 대한 증거가 전편의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다. 그에 대해 깊이 묵상해 볼 때 우리의 마음은 &quot;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quot;(딛 2:13)께 경배 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할렐루야!!&lt;br&gt;&lt;br&gt; Arthur W. Pink 요한복음 강해 p10&lt;br&gt;&lt;br&gt;  &quot;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quot;(딛 2:13).&lt;/p&gt;</description>
      <category>강해시리즈/요한복음 강해 (An Exposition of John)</category>
      <author>En Hakkor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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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5 Jun 2026 15:30:0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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