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강해시리즈/창세기 강해 (Gleanings In Genesis) (159)
En Hakkore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 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43:13, 14). 여기에서 야곱이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는지 주목하라 "전능하신 하나님."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데 나타나실 때 사용허신 호칭이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창 17:1). 또 이것은 이삭이 야곱을 축복할 때 사용한 호칭이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28:3). 그러므로 여기에서 야곱은 그와 같은 호칭을 사용하는 가운데 ..
다음으로 우리는 그의 장자가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라는 말씀을 읽는다(22절). 그리고 곧이어 이삭이 죽었다(29절). 아, 가련한 야곱이여! 슬픔이 계속해서 그에게 임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의 손은 그에게 점점 더 강하게 임했다. 마침내 그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과 관련하여 일이 터졌다. 그의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그로부터 없어진 것이다. 야곱은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하며 애통해했다. 이것은 너무도 가혹한 슬픔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창세기는 이렇게 기록한다. "야곱이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신자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신분을 준 은혜와 넘어지지 잘하는 신자를 오래 참음으로 붙잡아 주는 은혜 - 둘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놀라운 은혜인지 결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나의 죄가 법정적으로 영원히 제거된 것과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인 나의 죄와 허물을 긍휼로써 다루시는 것 - 둘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놀라운 은혜인가? 물론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은 영원히 사실이다. 그러나 신자들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따라 처벌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따라 그대로 갚지 아니하시는" 것 역시 똑같이 사실이다(시 103:10). 민수기 23:21은 많은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를 주는 말씀인가? "그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자 아니하시는도다." 이것은 완약한 마음으로 늘 원..
야곱이 벧엘로 돌아오는 결과는 너무나 아름답다. 오늘 나는 이 부분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는 대신 요점만 간략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그가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으로 불릴 것을 다시금 확증하시고, 스스로를 "전능한 하나님" 으로 계시하시며, 그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시며,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올" 것을 확언하시며, 마지막으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그와 그의 후손에게 줄" 것을 확약하셨다(11, 12절). 계속해서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라는 말씀이 따르는데(14절). 이로부터 하나님과 야곱 사이의 교제가 다시금 충..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35:3). 야곱은 가족들에게 우상을 버릴 것을 명령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에게 함께 벧엘로 올라갈 것을 촉구했다. 여기에서 야곱은 하나님이 어떻게 환난 날에 자신에게 응답하셨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러한 말은 그들 모두가 그와 함께 벧엘로 올라가는 것이 지극히 마땅함을 역설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세겜에서의 가혹한 복수로 인해 지금 그들 위에 드리워져 있는 어두운 먹구름을 하나님이 몰아내실 것이라는 소망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
앞의 글에서 우리는 야곱이 에서와 헤어진 후 나중에 세일로 찾아가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반대쪽으로 이동한 것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창세기 34장의 슬픈 기록은 그냥 건너뛰었다. 창세기 34장의 끔찍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야곱이 급히 세겜을 떠났을 것으로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야곱에게 라반은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에서 또한 피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이제 또 다시 세겜 사람들로부터도 피해야만 했다. 그러면 이제 그는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아, 가련한 야곱이여! 그는 진퇴유곡 가운데 빠져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극단의 상황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의 기회가 시작되는 법이다. 그것은 여기의 야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은 다시 한 번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때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30:8). 에서는 자신이 앞서 만난 짐승떼의 의미를 알고자 했다. 야곱의 대답은 매우 솔직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형의 마음을 움직임에 있어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신의 예물을 의지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또 여기에서 야곱이 에서를 어떻게 부르는지 주목해 보라. 5절에서 스스로를 "당신의 종"으로 부른 것처럼, 또한 그는 여기에서 에서를 "나의 주"라 부른다. 이러한 굽실거리는 태도는 세상 사람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합당한 태도가 아니다. 이러한 그의 지나칠 정도로 비굴한 태도는 그의 노예적인 두려움을 그대로 보여 준다. 이러한 태도는 그가 형의 우월성을 인정할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음..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가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헤롸 요셉은 뒤에 두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창 33:1-3). 여기에서 우리는 야곱의 믿음에 또 다시 반전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한다. 사실이 허구보다 더 이상한 법이다. 그것은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야고보는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마치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는" 사람과 같다고 말한다(약 1:24). 세상에 있는 모든 책들 가운데 성경만큼 사람의 마음속에 가장 깊숙이 숨어 있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