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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131] 벧엘로 돌아온 야곱 본문

강해시리즈/창세기 강해 (Gleanings In Genesis)

[창세기 강해 131] 벧엘로 돌아온 야곱

En Hakkore 2024. 3. 22. 10:28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35:3).

야곱은 가족들에게 우상을 버릴 것을 명령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에게 함께 벧엘로 올라갈 것을 촉구했다. 여기에서 야곱은 하나님이 어떻게 환난 날에  자신에게 응답하셨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러한 말은 그들 모두가 그와 함께 벧엘로 올라가는 것이 지극히 마땅함을 역설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세겜에서의 가혹한 복수로 인해 지금 그들 위에 드리워져 있는 어두운 먹구름을 하나님이 몰아내실 것이라는 소망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4절).

여기에서 모든 가족이 야곱의 명령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들은 자신들의 "이방 신상들" 뿐만 아니라 "귀고리글" 까지도 버렸다. 이것들 역시도 종종 우상 숭배를 위한 용도로 전환되곤 했었다.

이러한 사실은 아론이 "금 귀고리들"로부터 금송아지를 패물로 장식하고 그가 사랑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대로 내가 그에게 벌을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야곱은 드라빔과 귀고리들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자고 하지 않고 땅에 묻어 버렸는데,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사탄에게 속한 것들은 결코 하나님의 일에 사용될 수 없음을 가르쳐 준다. 악한 것은 그 모양까지도 버려야 한다. 물론 야곱의 가족들이 모두 그의 명령에 기꺼이 따른 것에는 하나님의 손이 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실제로 이 사건 전체에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난다.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즉각적인 효과, 그의 가족 전체의 즉각적인 순종, 그리고 특별히 5절에 묘사된 사실("그들이 떠났으니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 이 모든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바로 앞에 인용한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들을 - 심지어 그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에 대하여까지 - 당신의 뜻대로 주관하시는 것에 대한 한 가지 두드러진 실례를 발견한다.

세겜 사람들은 야곱의 자족에 대해 극도로 격분해 있었다. 따라서 만일 하나님이 역사(役事)하지 않으셨다면, 틀림없이 그들은 곧바로 야곱의 가족들에게 복수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직접적인 허락 없이는 아무도 그의 백성들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

원수들이 우리에 대하여 격분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을 불어 넣음으로써 능히 그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라는 말씀은 얼마나 사실인가!(잠 21:1).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면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통치하신다. 💕

얼마 전에 독일 기병대가 자신들보다 훨씬 수가 적은 영국군을 두려워하는 것을 발견한다.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벨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해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35:6, 7).

여기에서 처음에 벧엘이 그 본래의 이름인 "루스"로 불리고 있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루스"는 "떠남"을 의미한다.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났으며, 밧단아람에 거하는 동안 "제단"을 쌓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제 그는 하나님에게, "하나님의 집"에, 하나님의 제단에 돌아온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발걸음을 돌이켜 자신이 "떠났던" 장소로 돌아와야만 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애굽을 떠난 후,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슴을 읽는다.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억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13:3, 4).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35:8, 9).

여기의 두 절은 서로 불가 분리적으로 연결된다. 야곱이 아버지의 집을 떠난 때부터 다시금 벧엘로 돌아온 때까지, 성경에 드보라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야곱의 떠남과 돌아옴은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에 대한 언급에 의해 서로 연결된다.

같은 사실이 9절에 다시 나타난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하나님은 야곱에게 그가 밧단아람에 도착하기 전에 나타나셨다. 숙곳과 세겜에서 살았던 기간과 마찬가지로, 라반과 함께 보낸 모든 기간은 잃어버린 것이었다. 외삼촌의 집에서 봉사한 20년은 "나무와 풀과 짚"이었다.

우리는 히브리서 11:29-30에서도 이와 동일한 원리가 나타나는 것을 발견한다. 거기에서 우리는 먼저 "믿음으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넜다"는 말씀을 읽는다. 그러고 나서 우리가 읽게 되는 다음 말씀은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라는 말씀이다. 광야에서 불신앙 가운데 방랑한 40년은 무시되었다.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역사(歷史)가운데 포함되지 않을 것이었다. 광야의 40년은 잃어버린 것이었다.

사랑하는이여, 언젠가 우리의 모든 행정을 기록한 책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읽혀질 것이다. 그때 나는 우리의 삶 가운데 아마도 대부분의 기간이 여기와 비슷한 비극적인 공백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

Arthur W. Pink 창세기 강해 p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