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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134] 야곱의 말년의 생애 본문

강해시리즈/창세기 강해 (Gleanings In Genesis)

[창세기 강해 134] 야곱의 말년의 생애

En Hakkore 2024. 3. 22. 10:48

다음으로 우리는 그의 장자가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라는 말씀을 읽는다(22절). 그리고 곧이어 이삭이 죽었다(29절). 아, 가련한 야곱이여! 슬픔이 계속해서 그에게 임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의 손은 그에게 점점 더 강하게 임했다.

마침내 그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과 관련하여 일이 터졌다. 그의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그로부터 없어진 것이다. 야곱은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하며 애통해했다. 이것은 너무도 가혹한 슬픔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창세기는 이렇게 기록한다.

"야곱이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37:34,35).

이러한 고통들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신적 진노의 표적으로 볼 것인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볼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 대해 그렇게 행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신다. 심지어 고통조차도 그의 사랑의 선물의 일부이다. 💕

그것은 그의 충족하심을 경험적으로 배우게 하기 위해 신실하심 가운데 보내진 것이며, 우리의 복을 위해 보내진 것이며, 우리를 연단하기 위해 보내진 것이며, 우리가 세상에 속한 것들로부터 마음을 떼게 하기 위해 보내진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依支)하도록 하기 위해 보내진 것이다.

야곱이 경험한 모든 상실과 시련과 괴로움들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모든 것" 안에 포함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연단이 즉시로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후에" 왔다(히 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처음에는 그는 오로지 육체의 저항만을 나타냈을 뿐이었다. 그의 아들들이 애굽으로부터 돌아왔을 때를 생각해 보라.

그때 시므온은 함께 돌아오지 않았다. 더 나쁜 소식은 "애굽의 주"가 다시 올 때는 반드시 베냐민을 데려와야 한다고 요구했다는 것이었다. 그런 소식을 듣고 야곱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들어 보라.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42:36).

아, 가련한 야곱이여!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대신 보이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믿음으로 행하는 대신 보는 것으로 행하고 있었다. 이 모든 사건들 속에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을 수 있음을 그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단순한 감각(感覺), 즉 보는 것과 듣는 것과 느끼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의 야곱을 판단하기에 앞서 먼저 로마서 2:1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그러나 야곱이 이러한 마음 상태 가운데 계속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그에 대해 다음으로 읽게 되는 말씀은 그의 기분이 상당히 나아졌음을 보여 준다.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오라"(43:1, 2).

야곱의 아들들이 첫 번째로 애굽에 내려가서 얻어온 양식을 곧 떨어졌다. 그러나 그 땅에 기근은 여전히 심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야곱은 아들들에게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오라"고 명령했다. 여기의 "조금"이라는 단어는 그에 대한 하나님의 연단의 긍정적인 결과를 증명하지 않는가?

불신앙과 탐심은 장기간의 기근에 대비하여 많은 양식을 쌓아두기를 바라는 법이다. 그러나 야곱은 "조금"으로 만족한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그의 탐욕적이며 이기적인 모습을 보지 못한다. 대신에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형편까지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와 관련하여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의지(依支)했다.

그러나 문제는 있었다. 야곱의 아들들은 베냐민을 데려가지 않는 한 애굽에 내려갈 수 없었다. 그러나 베냐민을 데려가는 것은 야곱이 가장 꺼리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야곱의 마음속에서 격렬한 싸움이 일어났다. 아버지의 사랑과 기근으로 인한 굶주림이 서로 싸웠다.

아버지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유다가 베냐민의 보증인이 되겠노라고 자칭하며 나섰다. 그리하여 야곱은 비록 내키지는 않았지만 베냐민을 데려가도록 하락했다. 여기에서 노인 야곱의 수용(受容)하는 태도를 주목해 보라.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에 마지못해 굴복하는 사람의 찌무룩한 동의(同意)가 아니었다. 그렇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합당한 태도를 받아들였다. 그는 "애굽의 주"가 요구한 것을 묵묵히 수용하면서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다. 💕

Arthur W. Pink 창세기 강해 p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