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4/03/04 (15)
En Hakkore
출전을 만류하는 백성들 "왕이 백성에게 이르되 나도 반드시 너희와 함께 나가리라 하니." 그의 마음은 여전히 압살롬을 향해 있었고, 자신이 싸움 현장에 있는 것이 그를 보호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그는 아비의 감정을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부드러운-비록 그것이 자기에게 맞서 반역을 일으킨 자를 향한 것일지라도-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때 다윗을 자극했던 보다 깊은 특성을 지닌 무언가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가 직접 싸움터에 나가려고 했던 것은 이스라엘에 그 모든 문제를 초래한 것이 자신의 죄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너무나 고귀한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그 싸움의 가장 위험한 최전선에는 바로 자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러분은 내가 앞선 몇 장들에서 계속..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욥 20:5). 인간적이고 일시적인 기준으로도 그 정도라면, 영원의 빛에 비추어 본다면 얼마나 더 그러하겠는가! 아,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결코 끝나지 않는 미래" -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복된 승인하에서 즐기거나 그분의 두려운 저주하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할 것이다-에 관한 말할 수 없을 만큼 엄중한 생각에 의해서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만약 그것의 결과가 전능자의 영원한 찡그림이라면, 사람들의 미소와 칭찬이 우리에게 무슨 가치가 있는가? 죄의 쾌락은 잠시뿐이나(히 11:25), 하나님의 의로운 손 안에 기쁨은 영원하다(시 16:11). 만약 인간이 온 세상을 얻고도 그의 영혼을 잃는다면 그것이 그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
심은 대로 거둠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에게 먹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삼하 17:27-29). 여기에서 다시 상황이 바뀐다. 그리고 우리의 관심은 다윗의 적들의 적의로부터 그의 친구들의 친절로 향한다. 참으로 이 장(章)들에는 생생한 대조가 넘처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모든 세상적 삶에서도 마찬가지 아닌가? 하기야 사탄에 의해 지배되지만 하나님에 의해 더 크게 지배되고 있는 이 세상..
마하나임으로 "이에 다윗은 마하나임에 이르고"(삼하 17:24a) 마하나임은 갓지파에 속한 레위인들의 도시들 중 하나였다(수 13:26). 우리는 창세기 32장을 통해 이 장소에 얼마나 성스러운 기억들이 관련되어 있는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야곱이 오랫동안 라반의 집에서 머물다가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에 머물렀던 것이 바로 이곳이었다. 당시 그는 에서와의 비우호적인 만남을 향해 나아가던 중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났다. 신앙의 분별력을 지닌 야곱은 이것을 주님께로부터 온 좋은 징조로 여겼다. 그 사자들을 본 그는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다"(창 32:2). 만약 하나님이 그를 위하신다면, 누가 그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제 다윗은 ..
아히도벨의 자살 "아히도벨이 자기 계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일어나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의 조상의 묘에 장사되니라"(삼하 17:23). 이것은 말할 수 없을 만큼 엄중하다. 여기에는 앞의 내용과 크게 대조되는 것이 제시된다. 앞 절에서 우리는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후새의 도움을 통해 일시적으로 구출되었던 것을 보았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주된 적이 그 자신의 미친 행동을 통해 스스로 영원한 파멸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모습을 본다. "아히도벨"이라는 이름이 "어리석은 자의 형제"를 의미한다는 것은 충분히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자살이라는 죄를 짓는 자들 보다 어리석은 자는 있을 수 없다.😰 아히도벨은 일시적 충동 때문에 이..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제안한 모략을 뒤엎기 위해 다윗의 친구 후새를 사용하셨던 것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것은 도망 중인 왕에게 약간의 쉴 틈을 제공해 주었다. 후새는 즉시 자기의 주인에게 자신의 계획이 성공했음을 알리기 위한 절차에 착수했다(삼하 17:15-16). 전령 역할을 하던 두 명의 제사장은 바후림에 있는 어느 농부의 집에 숨어야 했고, 그 농부의 아내가 찧은 곡식으로 덮어 놓은 우물 안에 머물러야 했다. 하나님의 종들이 적들을 피해 숨기 위해 얼마나 이상하고 예상치 못한 장소에 머물러야 했는지는 심판의 날에나 완전히 알려질 것이다. 말이 난 김에 말인데, 우리는 이 사건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에 유념해야 한다. 즉 우리는 서둘거나 잘난 척하지 말고 늘 하나님이 은혜..
후새의 제안 "나는 이렇게 계략을 세웠나이다 온 이스라엘을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바닷가의 많은 모래 같이 당신께로 모으고 친히 전장에 나가시고"(삼하 17:11). 이것은 앞의 전제들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논리적 대안이다. 아히도벨이 요구했던 "사람 만 이천 명"(17:1)은 다윗 같은 지휘관과 그가 지휘하고 있는 유명한 용사들과 맞서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압살롬은 온 나라의 군사들을 다 동원해 병력의 숫자로 그의 아버지를 압도해야 한다. 후새는 압살롬에게 총동원령을 내리라고 혹은 압도적인 숫자의 병력을 모으라고 조언하면서 시간을 벌고 있었다. 그가 압살롬을 설득해 자기가 돕고 있는 사람에 대한 군사 행동을 늦추면 늦출수록 그의 실제 목표는 더 잘 달성되는 셈이었다. 압살롬이 행동을 늦출수록,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