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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 Hakkore
"그 두 염소를 가지고 회막 문 여호와 앞에 두고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레 16:7-8). 여기서 아사셀은 이스라엘의 죄들을 사람이 살지 않은 곳으로 지고 갈 그들의 대리자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여호와께서 받으시는 "여호와의 "유월절" 이셔야만 했고, 그 다음에야 비로소 그가 우리가 받을 "우리의 유월절"(고전 5:7)이 되실 수 있었다. 이제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이 은혜로 예비하신 것의 골자, 즉 "어린 양"에 대해 살펴보자. 이에 대해 상세히 다룰 수는 없으나, 젊은 설교자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폭넓은 개요를 제공해 드리고자 한다.🫰 어린 양이 구주임의 상징으로 얼마나 적절한가 하는 것이 즉시 드러난다. 어린 양은 부드럽고 순..
이런 사실들에 비추어 볼 때, 이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각별히 주의를 집중해야 마땅할 것이다. 첫째, 유월절 제정의 정황을 살펴보자. 그 때는 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들이 끝날 즈음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선포하셨다.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은 왕위에 앉아 있는 바로의 장자로부터 맺돌 뒤에 있는 몸종의 장자와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죽으리니 애굽 온 땅에 전무후무한 큰 부르짖음이 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를 구별할 줄을 너희가 알리라"(출 11:4-7). 5절의 정확한 표현을 주의 깊게 살피기 바란다. "애굽 땅에 속한 모든 처음 난 것은 죽으리..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 이 후에 너희의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이 밤은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출 12:14, 26-27, 42). 그러므로 이 절기를 지정한 것은 그분의 백성을 향하신 여호와의 크나 큰 선하심과 그들을 죽음에서와 종의 집에서 구원하신 일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그 절기는 지극히 절실하던 날 밤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해 베푸신 그 충족하고도 복된 배려를 마음에 새기게 하고자 마련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절기는 ..
둘째,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유월절을 지켰다"(수 5:10)고 말씀한다. 헨리(Henry)는 다음과 같이 적절히 지적한다. "가나안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들은 적들의 움직임을 관찰하고서 매우 이상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전쟁에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니, 병사들은 종교 의식에서 면제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이다(그들은 그런 일에 참여할 시간도 여유도 없다). 그러니 여호수아는 전쟁을 개시하면서도 예배의 행위를 잇달아 행하고 있다. 훗날 또 다른 여호수아에게 주신 다음의 말씀이 이와 일치한다.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사람들을 놀라게 할 자들이라"(슥 3:8, 개역개정은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로 번역함. 역주)..
2. 유월절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처음 들어갈 때의 이스라엘의 처신을 관찰해 보면 복스럽기 그지없다. 왜냐하면, 자연의 행위가 아니라 신적 은혜의 열매들이 거기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요단 강에서 그토록 놀랍게 역사하신 후, 그들은 성급하게 서두르거나 그들의 기업을 즉시 소유하려 하지 않았다. 요단 강물이 이적적으로 갈라져서 그들이 마른 땅을 디디고 건넜으니, 가나안 족속들은 크게 기가 죽어 있었을 것이고, 그러니 이스라엘로서는 손쉽게 승리를 거둘 발판이 이미 마련된 셈이었다. 원수들이 제정신을 차리기 전에 이런 공포를 최대한 이용하여 즉각적으로 결정타를 가하는 것이 군사적인 면에서는 "좋은 정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의 방법을 따르거나 세상의 수단을 사용하지 않는다.👏 ..
모든 일에서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힘을 북돋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러나 먼저 나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신해야만, 그에 대한 감사의 복종과 섬김 속에서 나의 애정이 그분을 향해 솟아나오는 법이다.🫰 두려움에서 비롯되거나 상급에 대한 기대감에서 촉발되는 섬김은, 그 어떠한 것이라도 율법적이거나 탐욕적인 것이므로 그리스도께서 받으시지 않는다. 죄를 용서하시는 긍휼을 영혼 속에서 깨닫지 않고서는 우리 속에 내재하는 죄를 도무지 이길 수가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법적으로 죄에 대해 죽은 자들일 뿐 아니라 죄를 이기는 승리자들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가 법적으로 완전히 정복되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바라볼 때에, 실질적으로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갖기를 추구하게 된다. 오랫동안 고착..
이러한 실천적 할례, 곧 우리의 죄를 죽이는 문제에 있어서, 땅이 하늘 아래 있는 한 다른 모든 것이 그렇듯이 사람의 생각과 길이 하나님의 그것에 훨씬 못 미친다. 사람은 저것을 얻기 위해서 이것을 해야 한다거나, 저것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것을 피해야 한다거나, 선에 속하기 위해서는 악을 멀리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일을 행할 힘을 대체 어디에서 얻어야 할지를 모른다. 그러나 이와는 사뭇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길은 의무를 이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그가 친히-그것도 값없이-구비시켜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기쁨으로 감사로 부응하게 하시는 것이요,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그분을 사랑하는 것으로 갚아드리지 않을 수 없게 하시는 것이며,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먼저..
여기서 우리는 중생 혹은 은혜의 기적의 두 가지 근본적인 면이 함께 제시되는 것을 본다. 첫째, 제거의 면인데, 마음의 할례가 그것이다. 이 일이 행해지면 마음이 귀하게 간직해오던 죄들과 기꺼이 결별하게 되고, 마음의 애착들이 모든 악에게서 멀어진다. 이는 적극적인 면을 위한 것인데, 바로 마음이 그 모든 기능과 힘으로 여호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 그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그런 사랑이야말로, 존 길이 올바로 지적하듯이, "모든 사람의 의무"요 따라서 중생하지 않은 자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존 길은 그의 추종자들과는 반대로 "의무로서의 믿음"만이 아니라 "의무로서의 사랑"도 가르친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친히 그 마음에 할례를 베푸시기까지는 아무도 이 의무를 행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마음에 할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