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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 Hakkore
우리는 이제 우리의 본 주제를 설명해 주는 아브라함의 경우를 들어보겠다. 아마도 이것을 영적인 타락으로 보는 이가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사"(창 12:7)란 말씀을 읽는다. 이것은 또한 이렇게 나타났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이 말은 자의적이거나 자기 만족에 겨워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기의 사랑을 보인 것들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함을 말하며 주님을 만족한 분깃으로 삼음을 말한다. 사람은 '주님의 나타내심을' 매일 체험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할 때 우리의 ..
우리는 그러므로 영적인 타락에서 회복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 패역한 자의 회복하는 '수단'이 무엇인지, 하나님에게서 떠난 자의 구원받기 위한 '수단'이 무엇인지를 논하고자 한자.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특수한 사건에 주의를 기울이기 이전에 잠언서 28:13의 말씀에 다시 반 번 돌아가고자 한다. 첫째,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리라." 우리의 죄를 숨기는 것은 빛 가운데로 나오는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정직하게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 나아온다. 죄를 숨긴다는 것은 우리 형제들에게 죄를 감추는 것이며, 우리가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잘못을 인정하기를 꺼려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영혼은 형통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과 사귐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둘째, "죄..
이제 우리는 회복의 조건부, 이를테면 현안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이 용어는 우리 중 어떤 이에게 부담스런 말이겠으나, 여기에 관련하여 이것은 바르게 시정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여러 저작자들이 갖가지 다른 방법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였지만, 우리는 사용코자 하는 말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이것을 조건부라 칭하였다). 우리는 만약이라도 죄지은 성도가 하나님과 교제관계를 회복하기 전에 어떤 조건들을 구비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 말을 법정적인 의미(Legalistic sense)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이것을 수행한다고 당사자에게 공로로 돌리지도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물건을 사고 팔듯이 어떤 계약을 맺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행한 데 대한 보상으로 복을 부어 주시는 것도 아니다. 그는 ..
성령만이 메말라 시들어 가는 신자에게 변화받고자 하는 소욕을 불러일으켜 주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목적에 사용되는 수단들을 제정해 놓으셨다. 우리가 이러한 수단들을 경시한다며 다음과 같은 처지로 전락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르기를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내가 화가 있도다 모함자가 심히 모함을 행하도다 모함자가 모함을 행하도다 하였도다"(사 24:16) 그래서 더 나음을 입기 위한 시도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수단들을 무시하면서 더 낫기를 소망한다면 우리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질 것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행치 못하는 사상을 그리워하거나 회복케 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의 부패를 감지하고 그것에 마음이 동하면 그때 우리는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의 요구조건에 부합해야 한다. 그래야만 치료가 행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한다. 정작 그들 장본인들이 스스로 이르기를 타락한 상태에서 회복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며, 그 요구조건에 부합 하기가 매우 쉬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많은 사람들은 구원얻는 일이 가능한 방법 중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크나큰 잘못이다. 죄인에게 있어서 복음에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 이상은 아무것도 요구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정작 그것을 이끌어 오는 데 요구되는 이 은혜의 기적이 전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항하던 완고한 마음이 그의..
오늘날 기독교계에서는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부패하고 있음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차라리 에브라임의 실상을 방불케 한다. "저는 이방인에게 그 힘이 삼키웠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얼룩할지라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증거가 되나니 저희가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하는도다."(호 7:9,10)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당신들의 처지는 지금 어떠한가? 당신들은 진정으로 신령한 기쁨과 평강을 누리고 있는가? 이것들이 믿음생활의 불가불리의 열매들이며,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는 가운데 나타난 것들인가?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들을 환상적으로 상상적으로 생각만 함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 진수를 찾아 맛봄을 말한다...
독자는 이제 우리가 말한 말의 의미를 보다 쉽사리 깨달을 줄 믿는다. 즉 영적인 타락에서 회복함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그리고 타락한 상태에서 그 비참함을 지각하는 일과 그것에서 구원받을 필요성을 절감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대충 깨닫고 있을 것이다. 죄는 지각을 어둡게 하고 심령을 둔하게 한다. 이것은 불신자에게 적용됨같이, 어느 정도 혹은 극단적인 경우에는 거의 완전히 타락한 신자에게 해당된다. 결코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이것은 큼직한 악명높은 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중에는 결코 이런 죄를 짓지 않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 마음의 지각이 어두워져서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분리되어 '하나님과의 교제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옮겨졌을 뿐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사람들이 이러한 수단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당면한 어려움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 회복의 어려움 부흥과 회복은 반드시 있어야 하고 필요하며 또 가능한 것이지만, 이것을 달성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영적인 타락을 허용한 자의 회복과 관련하여 문제가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타락한 자가 하나님의 요구조건에 부합하는 문제에 있어서 이것이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적어도 삼중의 어려움이 있다. 첫째는 타락한 자가 자신의 어려운 위치를 깨닫는 점에 있어서의 어려움이요. 둘째는 회복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면에 있어서의 어려움이요, 세째는 하나님의 요구조건에 부합하는 일에 있어서의 어려움이다. 죄는 사람으로 어둡게 하는 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