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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성장 115] 성장의 회복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성장 (Spiritual Growth)

[영적인 성장 115] 성장의 회복

En Hakkore 2024. 4. 7. 08:30

성령만이 메말라 시들어 가는 신자에게 변화받고자 하는 소욕을 불러일으켜 주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목적에 사용되는 수단들을 제정해 놓으셨다. 우리가 이러한 수단들을 경시한다며 다음과 같은 처지로 전락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르기를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내가 화가 있도다 모함자가 심히 모함을 행하도다 모함자가 모함을 행하도다 하였도다"(사 24:16) 그래서 더 나음을 입기 위한 시도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수단들을 무시하면서 더 낫기를 소망한다면 우리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질 것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행치 못하는 사상을 그리워하거나 회복케 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깨달아 실행한다면, 회복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며 그때 우리는 부과된 의무를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그는 우리 안에 죽게 된 그것들을 새롭게 하며 능력있게 할 것이다. 구원의 문이 우리에게 열려지기 위해서는 구하고 찾고 두드려리는 사역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2세기 이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기룩했던 자가 있었으니 그는 알미니안주의자가 아니라 오히려 수준높은 칼빈주의자였다(Jhon Brine, 그의 저작들은 1852년 Gospel Standard 10월 호에서가장 좋은 호평을 받았다).

"이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서는 부지런함과 진지한 노력이 요구된다. 이것을 치료하기 위해서서는 병약한 상태를 슬퍼하거나 어리석음을 고백하는 정도에서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이렇게 수차에 걸쳐 반복해 보았자 이것을 제거하는 데는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며 오히려 질병만 유발시킬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전의 건강과 정력을 회복받기 원한다면, 슬퍼하거나 한탄하는 이상으로 행동해야 한다. 우리는 어리석음을 유발시키는 올무나 그렇게 하는 당사자들과 거리를 두어야만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전혀 어떤 목적도 없이 우리의 과거 실수만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 버린다.

우리가 영적인 타락을 자초하는 일들을 좋아하고 이러한 것들에 몰두해 있는 한 이전의 능력을 회복하는 일을 기대한다면 이는 큰 오산이다. 미구에 앞으로 올 때에 우리에게 악영향을 주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 사악한 죄들을 슬퍼하는 정도로 그쳐서야 되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심신에 병을 유발시키는 것을 일격에 떨쳐 버려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충고에 따르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대로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습관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으며 우리의 마음가운데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자연인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이 이를 이기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은 이러한 정욕을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죽여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아를 부정하는 일에나 정욕이나 집착하는 것들을 제어하는 일에 느슨해진다면, 우리의 영성에는 좀이 쓸어 결국 그것들이 놀아나는 방향에 장단을 맞추는 격이 된다. 우리가 힘써 이런 악한 유혹들을 물리치지 않으면 회복이란 완전히 불가능한 것이다.

이것들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들어와 자리잡고 있는 한 이것들을 끊어버리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 어려움이 있다 함은 이것이 우리의 모든 자연적인 성향과 중생 이전의 삶과 반대가 되기 때문이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마 5:29). 그리스도께서도 전에 좋아하던 육체 죽이는 일이 간단하지 않음을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이 구미에 당기지 않은 명령들에 마음을 솔깃하게 기울일 것 같지 않기 때문에, 그는 또 이렇게 말씀을 이으신다. "또한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눈'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지체이듯이 '오른손'은 (특히 노동자에게) 가장 유용하고 쓸모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 비유적인 말씀은 우리에게 가장 좋아하던 우상을 부인하고 정욕을 죽이라는 말씀이다. 우리를 현혹시키는 것들이 아무리 좋게 보여도 우리는 그것을 거부해야만 한다.

이러한 과업은 마치 우리의 손을 절단하는 것과 같은 아픔과 고통이 있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물론 마취제란 생각해 볼 수도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건지기 위하여 부패한 지체를 절단해 버린다면, 우리는 어찌하여 영혼을 건지기 위한 아픔을 감내하지 않는가?

천국과 지옥은 우리의 은혜가 우리를 지배하느냐 우리의 육체가 우리를 지배하느냐에 따라 관계한다. "당신 지상과 천상의 기쁨을 동시에 누리길 기대해서는 안된다. 당신은 들릴라의 무릎에서 아브라함의 품안으로 나아간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T. Manton).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어린이와 같은 유치한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가 은혜를 회복시키길 원한다면, 최초의 일들을 행해야 한다. 이것은 겸손과 부지런함으로 하되 교만과 마지못해 하는 것은 금물이다. 우리는 부주의함과 게으름으로 말미암아 아는 일이나 실행하는 일에 퇴보하기 때문에, 배우고 행하는 일을 새로 시작해야 한다.

성도는 가끔 학생과 비교된다. 학생은 공부하는 일을 게을리함으로 진전하지 못한다. 그들은 말이나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던 초기의 일들을 거의 다 잊어 먹고 있다. 이 경우 시초의 일들을 새롭게 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도 가끔은 최초 배웠던 하나님 말씀의 원리들을 다시 새롭게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가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진전을 이루기 위해,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 원리를 쉽고 평이하게 가르치기 위해 새롭게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러나 그가 이것을 무시할 때 실패를 맛볼 수밖에 없다. 그는 오래 전에 배가 무엇에 배웠던 확신, 회개, 애통, 겸손 등에 대해 다시 새롭게 해야 한다. 우리가 무엇에 대해 생각하든 이것 없이 부흥이란 있을 수 없다"(Brine)♡

타락한 자가 회복함을 받는 일이 어려운 것은 교만한 마음을 낮추는 일이 어려운 데 있는 것이다.

Arthur W. Pink 영적인 성장 p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