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강해시리즈/창세기 강해 (Gleanings In Genesis) (159)
En Hakkore
이제 두 나무 사이의 유사점들을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1. 두 나무 모두 동산에 심겨졌다. 첫 번째 나무는 에덴 동산에 심겨졌으며, 두 번째 나무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떤 동산에 심겨졌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요 19:41). 이러한 말씀은 우리가 두 나무를 서로 연결시켜야만 하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첫 번째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 모두 "동산"에서 죽은 것은 얼마나 놀라운 유사점인가! 2. 두 나무 모두와 관련해서 우리는 "가운데"(in the midst)라는 말씀을 발견한다.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 3:9). 여기에서 두 나무를 함께 연결하는 접속사 "와"(and)는 두 나무가 동산 한가운데 나란히 있었음을 암..
우리의 목적은 창세기를 세부적인 부분까지 샅샅이 해설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창세기의 거대한 광산으로부터 비교적 눈에 잘 안 띄는 보화들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그 광산에는 무궁무진한 영적 보화들이 매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는 실천적인 교훈뿐만 아니라 각종 상징과 모형과 예시(豫示)들로 가득 차 있다. 창세기를 한 장 한 장 살펴나가는 가운데 그러한 것들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우리의 기쁨이 될 것이다. 구약의 상징들을 연구하는 가운데, 우리는 때로 그것들을 비교하거나 또 때로 그것들을 대조함으로써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이러한 이중적인 방법의 한 가지 두드러진 실례(實例)를 우리는 창세기 둘째 장에서 발견한다. 9절에서 우리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 듣는다..
3. 셋째 날의 역사 속에 우리 주님의 부활이 상징적으로 제시된다. 제 2장의 내용은 우리가 처음에 계획한 분량을 이미 초과했다. 따라서 우리는 부득이 나머지 내용은 간략하게 다루어야 한다. 구속사역을 성취함에 있어 필요한 세 번째 단계는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이었다. 죽은 구주는 아무도 구원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할" 수 있으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항상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히 7:25). 그것은 여기의 상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셋째 날의 역사(役事)가 부활을 상징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한 사실은 셋째 날에 발하여진 "뭍이 드러나라"라는 말씀 가운데 나타난다(9절). 전에 땅은 물 아래 가라앉아 - 혹은 수장(水..
2. 둘째 날의 역사 속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상징적으로 제시된다. 구속사역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다음 단계는 무엇이었는가? 성육신 그 자체는 우리의 필요에 부응하지 못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되는 흠 없는 완전한 삶을 계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파멸된 죄인 사이의 거대한 간격에 다리를 놓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를 위해 죄가 제거되어야만 했으며, 그것은 죽음이 들어오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하나님의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해야만 하며, 거룩한 자는 자신의 목숨을 내려놓아야만 한다. 하나님의 보좌..
1. 첫째 날의 역사 속에 신적 성육신이 상징적으로 제시된다. 타락한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목하고자 한다면, 어떤 일이 행해져야만 하는가? 하나님과 사람을 나누는 무한한 간격에 어떻게 다리가 놓일 수 있나? 어떤 천상의 사다리를 땅에 내려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오직 하나의 답변만이 가능할 수 있다. 인류 구원을 위한 첫 단계는 신성(神性)의 성육신이어야만 한다. 바로 이것이 출발점이 되어야만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야만 하며 하나님 자신이 죄 가운데 인류가 떨어진 바로 그 구덩이로 내려오셔야만 한다. 그래야만 인류가 진흙과 흙탕물이 가득한 곳으로부터 천상의 아름다운 장소로 옮겨질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종의 형상을 취하고 사람의 모양을 입으셔야만 한다. 💕 이와 같이 첫째 날의 역..
창세기를 처음 고찰하면서, 나는 여기의 창조사역과 "새 창조" 즉 신자 안에서의 영적 창조 사이에 존재하는 두드러진 유비관계(類比關係)를 지적했다. 먼저 어둠이 있었고, 다음으로 성령의 활동이 있었으며, 다음으로 권능의 말씀이 선포되었으며, 다음으로 빛과 함께 부활과 풍성한 열매가 있었다. 이와 같이 여기의 6일 간의 하나님의 사역의 기록 속에는 우리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유능한 사람들이 이미 충분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그냥 지나가고자 한다. 대신에 나는 여러분과 함께 여기의 구절들을 좀 다른 각도에서 적용해 보고자 한다. 창세기 첫째 장 속에는 그리스도와 관련한 것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여기에서 관심을 기울이고자 하는 것은..
5.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4 하반절). 히브리서 4장 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라고 말한다. 이것은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다. 우리는 이것이 문자적인 사실을 표현한 것으로 믿는다. 사람은 "영과 혼과 몸"으로 구성된 삼중적인 존재이다(살전 5:23). 피어슨(Dr. Pirson)은 그것들을 다음과 같이 구별한다. "영은 하나님을 의식(意識)하는 좌소(座所)이며, 혼은 자아를 의식하는 좌소이며, 몸은 감각을 의지하는 좌소이다". 죄를 범하는 순간, 아담은 영적으로 죽었다. 육체의 죽음은 영이 몸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지만, 영의 죽음은 영이 하나님으로부터 ..
3.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2 하반절). 여기에서 소망이 동터 오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폐허가 된 최초의 땅을 버리지 않으셨다. 설령 하나님이 버리셨다 하더라도, 그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의로운 심판 아래 놓으신 것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쓸 까닭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제 황량한 폐허가 된 것에 대해 그가 더 이상 관심을 가질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나 바로 여기에 주권적인 긍휼이 개입해 들어왔다. 그는 혼돈과 공허를 향한 은혜로운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그는 그것을 다시 세우며, 회복시키고자 계획하셨다. 이러한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최초의 것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었다. 거기에 신적 행동 즉 하나님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