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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14] 두 나무 본문

강해시리즈/창세기 강해 (Gleanings In Genesis)

[창세기 강해 14] 두 나무

En Hakkore 2024. 3. 13. 11:04

이제 두 나무 사이의 유사점들을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1. 두 나무 모두 동산에 심겨졌다.

첫 번째 나무는 에덴 동산에 심겨졌으며, 두 번째 나무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떤 동산에 심겨졌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요 19:41). 이러한 말씀은 우리가 두 나무를 서로 연결시켜야만 하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첫 번째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 모두 "동산"에서 죽은 것은 얼마나 놀라운 유사점인가!

2. 두 나무 모두와 관련해서 우리는 "가운데"(in the midst)라는 말씀을 발견한다.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 3:9). 여기에서 두 나무를 함께 연결하는 접속사 "와"(and)는 두 나무가 동산 한가운데 나란히 있었음을 암시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또한 우리 구주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을 보게 된다.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요 19:18).

3. 두 나무 모두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이다.

선악을 아는 법을 배움에 있어 두 번째 나무 즉 십자가보다 더 큰 것은 세상 전체나 성경 전체에 아무것도 없다. 거기에는 우리는 성육신한 선(善)을 본다. 거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완전하게 나타나는 것을 본다. 거기에서 우리는 다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과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은혜를 발견한다. 💕

그러나 거기에서 또한 우리는 악의 모든 가증한 속성들을 본다. 거기에서 우리는 피조물의 악함의 극치와 절정을 목격한다. 거기에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시각(視覺)으로부터의 죄의 가증함과 악독함과 두려움을 본다. 그렇다. 두 나무사이에는 절묘한 대조점들뿐만 아니라 똑같이 절묘한 유사점들도 있다. 십자가 역시도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이다.

4. 마지막으로, 창세기 3장 6절의 에덴 동산에 심겨진 나무 외에 또 다른 나무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3:6). 그 두 번째 나무 역시 분명 "먹음직"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신자의 생명을 위한 최고의 양식이다. 그것은 영혼을 위한 양식으로서 정말로 "먹음직"하다.

또 그것은 믿음의 눈에 얼마나 "보암직"한가! 거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가 도말된 것을 본다. 거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본다. 거기에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을 만날 수 있는 기초를 본다. 거기에서 우리는 우리 구주의 완성된 사역을 본다. 그것은 정말로 "보암직"하다

그러한 두 번째 나무는 또한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지 않은가! 그렇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능력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지혜"이기도 하다. 두 번 나무를 알 때, 죄인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는다.

오늘의 주제를 마치기에 앞서, 성경에서 "나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몇 군데를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창세기 3장 17절로부터 우리는 "나무"가 저주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을 배운다."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또 창세기 40장에 요셉과 함께 옥에 갇혀 있었던 두 사람의 꿈과 관련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떡 굽는 자의 꿈을 해석하면서, 요셉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40:19).

또 여호수아 8장 29절에서 우리는 "그가 또 아이 왕을 저녁때까지 나무에 달았다가 해 질 때에 명령하여 그의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라는 말씀을 읽는다. 이 모든 말씀들은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에 대한 얼마나 훌륭한 예화(例話) 들인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반면 창세기 18:1-4절을 읽어보라.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를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게 마시옵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위의 인용문의 마지막 구절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연상시키지 않은가? 만일 여기에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지 않다면, 아브라함이 세 사람의 방문자를 굳이 "나무 아래에서" 쉬도록 초청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여기의 "나무"는 두 말할 것도 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 "쉼"이 있다. 계속해서 8절을 읽어보라.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먹는 것은 교제의 상징이다. 여기의 세 방문자가 먹은 곳은 "나무 아래"였다.

이와 같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교제의 기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순서는 얼마나 놀라운가! 먼저 "나무" 아래에서 쉬고, 다음에 먹었다.

마지막으로, 출애굽기 15장의 마라 사건을 생각해 보자. 이것 역시 얼마나 풍성한 의미를 가지는가! 마라에 도착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곳의 물을 마실 수 없었다. "그 곳의 물이 썼기" 때문이었다(23절). 그리하여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셨으며 그것을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다"(25절).

여기의 상징은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명백하다.  여기의 "나무" 역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해 죽음의 처소로 내려가심으로써 쓴 물을 달게 만드셨다. 나아가 우리의 광야와 같은 인생길에 마라의 쓴 물이 단 물로 바뀌는 것은 오직 우리가 십자가의 원리를 우리의 매일의 삶 가운데 적용시킬 때 뿐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기꺼이 그의 죽으심을 본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특권이다(빌 3:10). 💕

자, 여기에 나타나는 순서를 주목해 보자! 첫째로, "나무"가 저주의 장소에서 나타난다. 둘째로 "나무"가 쉼의 장소로서 나타난다. 셋째로, "나무"가 교제의 장소로소 나타난다. 넷째로 "나무가" 신자의 매일의 삶의 원리로서 나타난다.

Arthur W. Pink 창세기강해 p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