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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13] 두 나무(창세기 2장) 본문

강해시리즈/창세기 강해 (Gleanings In Genesis)

[창세기 강해 13] 두 나무(창세기 2장)

En Hakkore 2024. 3. 13. 11:03

우리의 목적은 창세기를 세부적인 부분까지 샅샅이 해설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창세기의 거대한 광산으로부터 비교적 눈에 잘 안 띄는 보화들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그 광산에는 무궁무진한 영적 보화들이 매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는 실천적인 교훈뿐만 아니라 각종 상징과 모형과 예시(豫示)들로 가득 차 있다. 창세기를 한 장 한 장 살펴나가는 가운데 그러한 것들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우리의 기쁨이 될 것이다.

구약의 상징들을 연구하는 가운데, 우리는 때로 그것들을 비교하거나 또 때로 그것들을 대조함으로써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이러한 이중적인 방법의 한 가지 두드러진 실례(實例)를 우리는 창세기 둘째 장에서 발견한다. 9절에서 우리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 듣는다. 반면 사도행전 5장 30절에서 우리는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라는 말씀을 읽으며, 또한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라는 말씀을 읽는다.

이제 사려 깊은 독자들라면 자연스럽게 "왜 여기에서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단순히 '나무'로 말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분명 여기에는 겉으로 나타나는 것 이상의 훨씬 더 깊은 의미가 담겨있음이 틀림없다.

우리가 창세기 2장 9절로 되돌아가 여기의 두 나무를 서로 비교해 보고 또 대조해 보는 것은 성령께서 의도하신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만일 우리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우리 주님이 못 박히신 나무"를 서로 비교해 보고 또 대조해 본다면, 두 방법을 통해 우리는 매우 많은 사실들을 배우게 될 것이다. 먼저 몇 가지 대조점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첫 번째 나무는 하나님이 심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9절). 이와 같이 첫 번째 나무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아담이 아니라 하나님이 심으셨다. 그러나 두 번째 나무 즉 우리 주님이 못 박히신 나무는 사람이 세웠다.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니"는 짤막하지만, 너무나 두려운 기록이다(마 27:35). 갈보리 언덕에 그 잔인한 나무를 계획하고, 준비하고, 세운 것은 사람들이었다. 바로 이것이 첫 번째 나무와의 두드러진 대조점이다. 두 번째 나무를 세운 것은 창조주의 손이 아니라 피조물의 손이었다.

2. 첫 번째 나무는 보암직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3:6). 여기의 "보암직"이 정확하게 무엇으로 구성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은 이 나무가 아름답고 즐거운 것이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두 번째 나무와 얼마나 선명하게 대조되는가? 두 번째 나무에서 모든 것은 너무나 끔찍하고 살벌했다. 고통 가운데 계시는 구주, 야비한 군중들, 조롱하는 제사장들, 두 명의 강도, 흐르는 피, 세 시간의 어둠 - 여기에 보암직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첫 번째 나무는 보암직했다. 그러나 두 번째 나무에 달린 자에 대해 성경은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사 53:2).♡

3. 하나님은 첫 번째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을 금하셨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2:17). 이 나무의 열매에는 신의 금령(禁令)이 내려졌다. 이것 또한 두 번째 나무와 얼마나 다른가! 둘 사이의 대조는 얼마나 놀라운가! 두 번째 나무에는 어떤 제한도 없다. 여기의 경우 사람은 거리낌 없이 나아와 열매를 먹으라고 초청받는다.

죄인은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이 금지된다(시 34:8). 그러나 두 번째 나무에서는 모든 것이 정반대이다.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마 22:4). 첫 번째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명령받은 것과 정반대로, 이제 사람은 두 번째 나무의 열매를 먹으라고 명령받는다.

4. 하나님이 첫 번째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을 금하셨기 때문에, 사탄은 사람이 그것을 먹도록 만들기 위해 모든 책략을 사용했다. 반대로 이제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두 번째 나무의 열매를 먹도록 초청하시기 때문에, 사탄은 사람들이 그것을 먹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모든 권능을 사용한다.

이러한 절묘한 대조 역시 이것이 성령에 의해 기록된 것임을 나타내지 않는가? 우리의 첫 조상들이 금지된 열매를 먹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의 원수의 악의와 간교함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죄인들이 두 번째 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는 상태로 남겨지는 것도 일차적으로 옛 뱀 마귀의 간교한 책략 때문이다.

5. 첫 번째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것은 죄와 사망을 가져왔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2:17). 우리 인류 위에 저주와 그에 수반되는 모든 불행이 임한 것은 이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것 때문이었다. 반면 두 번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생명과 구원이 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요 6:53, 54).♡

우리 주님의 이러한 말씀은 인간의 타락과 관련한 에덴 동산의 이야기와 연결되지 않는가? 그리고 여기에서도 역시 두 나무 사이의 절묘한 대조가 나타나지 않은가? "먹는" 행동으로 말미암아 영적 생명을 잃은 것처럼, 또한 사람은 "먹는" 행동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6. 강도(強盜) 아담은 첫 번째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낙원으로부터 쫓겨났다. 반면 회개한 강도는 두 번째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낙원에 들어갔다.

우리는 여기에서 또 다시 둘 사이의 절묘한 대조를 발견한다. 강도는 두 나무 모두와 연결된다. 금지된 열매를 먹음으로 우리의 첫 조상들은 결국 강도질을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나무와 관련해서 또 다시 "강도"가 나타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 이상의 어떤 것이 아닌가?

특별히 두 강도의 완전한 다른 경험을 주목할 때, 요점은 한층 더 두드러진다. 한 강도는 낙원(에덴 동산)으로부터 쫓겨났고, 다른 강도는 낙원으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우리 주님이 굳이 "낙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얼마나 의미심장한가! 특별히 그가 그 단어를 사용한 것은 여기가 유일하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Arthur W. Pink 창세기강해 p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