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4/04/06 (15)
En Hakkore
기독교계의 여러 분야에 한때는 생기있고 참신하고 영혼을 교화시키는 일들로 여겨지던 것들이, 하나님의 성령을 거스르게 하고 그 역사에 찬물을 끼얹고 마치 시체 안치소와 같은 기분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거기 모든 것들은 냉냉하고 무미건조하고 생명이 없다. 거기 모든 사람들은 화석같이 굳어져서 봉사를 한다는 것이 오히려 영혼들을 죽게 한다. 영혼으로 하나님을 향하지 못하게 하는 사역은 주 안에서 기쁨을 누리고 감사의 순종을 하게 하지만, 필경은 영혼을 심연의 늪, 깊은 곳으로 빠트릴 것이다. 오직 미구에 닥칠 그날만이 이 모든 것들을 알려 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영적인 어린이가 성장하지 못하고 붙잡혀 있는가를, 그들이 하나님 말씀의 순전한 젖을 공급받지 못하고 다른 데에 머물러 있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
이제 위에서 지적했던 세 가지의 불빛 속에서, 기도생활을 등한히 함으로 필연적으로 어떤 결과가 일어났는지 생각해 보자. 내가 의무를 회피한다면 어떻게 반성할 수 있겠는가? 내가 하나님의 요구를 일마다 무시한다면, 하나님의 복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기도가 주요한 은혜의 수단인데 내가 그것을 하찮게 여긴다면, 나는 내게 주어진 은혜들을 혹 잃어 버리지 않을까? 유일하게 기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게서 은혜를 새로이 공급받는 것이라면, 나는 필시 약하고 병적인 존재가 아닌가? 나의 능력이 새롭게 갱신되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나의 영적 원수들을 성공적으로 거부할 수 있겠는가? 높은 곳에서 능력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순종의 길을 더듬을 수 있겠는가? 기도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대화할 수 ..
우리는 지금까지 영적인 타락이 초래되는 원인을 규명하는 데 강조점을 두어 왔다. 이렇게 함으로 우리는 계시록 2:5의 명령을 온전히 지킬 수 있으리라 본다. 우리가 영적인 건강을 해치는 요소들을 의식하지 않고서는 그것들에서 돌이키거나 치유할 수 없다. 그러나 젊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미리 어떤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게 하거나 그도 얼마 가지 않아 퇴보할 것이라고 지례 짐작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예방은 치료보다 더 우선시된다. 미리 경고를 함은 미리 무장하게 한다. 본 주제에 있어서 이 부분은 이중적인 의의를 갖는다. 즉 첫째는 임박한 재앙에 대한 경고요, 둘째는 은혜를 이미 다 팔아 먹은 자들에게 주는 교훈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신자들이 영적인 성장의 주요한 요소들을 충분히, 그리고 부지런히 사용하지 ..
둘째, 쇠퇴의 원인(2) 죄를 죽이는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은 자신을 쳐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진보는 시종일관 이것을 얼마나 오래 지속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가 회개할 때에 그리스도에게 바치기로 결심했던 것을, 그리고 세례받을 때에 마음 속에 다짐했던 것을 얼마나 집요하게 고수해 나가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가 참으로 회개했다면 세상과 육체와 마귀를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했을 것이다. 우리의 세례가 성경적인 것이었고 신자가 이 법의 영적이고 상징적인 의미 가운데 지혜롭게 들어갔다면, 그는 옛 사람을 벗어버렸을 것이며 그가 물에서 올라왔을 때에는 - 이는 마치 상징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은 것과같이 -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 당당히 걸어갔을 것이다..
둘째, 쇠퇴의 원인 갈라디아 5:17에서 언급되는 '육,' 즉 내재하는 죄는 단절되지 않는 것으로서, 언제나 '영,' 즉 신자의 영혼 속에 있는 은혜의 원리를 부단히 거스린다. 이 육적인 성향은 언제나 그 안에 내재해 있으며 사람이 그것을 깨닫든지 못 깨닫든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나도 은밀하게, 묘하게, 기만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것은 외부적으로 불순종의 행동을 하게 하며, 내부적으로 거룩한 자가 가장 싫어하는 불신앙. 자만. 자기 의를 생기게 한다. 사람 속에 있는 이 원수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매우 유리한 발판을 마련한다. 그것은 즉 우리가 중생치 못한 성향으로 말미암아 그 세력이 지배하는 것을 용납하기 때문이며, 그것의 저주스러운 간교함 때문..
첫째, 쇠퇴의 성격(2) 사람이 하나님의 것들에 대해 흥미를 잃어 버릴 때 쉽사리 나태해진다. 이러한 은혜의 수단들은 전적으로 무시되지는 않았지만 형식만 갖추었지 실제로는 기쁨도 없고 유익도 없다. 이때 성경은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써가 아니라 의무감으로써 읽혀진다. 은혜의 보좌는 주님과 깊은 관계를 맛보기보다 양심을 만족시키는 정도로 끝난다. 심령이 그리스도로 채워지지 않을 때 마음은 세상적인 것들로써 채워진다. 양심이 무디어 질 때 타협의 영이 역사하여 엄격함과 사려깊은 데서 떠나 부주의와 태만함에 빠진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식어질 때 그에 대한 순종이 너무 어려워 선을 행치 못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이미 주어진 은혜를 사용하지 못할 때 부패는 극심해진다. 우리가 주 안에서와 그의 능력 안에서 ..
첫째. 쇠퇴의 성격 우리가 여기에서 관심을 갖고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저작자가 '타락'이라고 명명했던 것으로 이 말은 빈번히 무시되고 사용하지 않아왔던 것이다. 여느 다른 신학적인 용어와같이 이 말은 적잖은 논쟁의 불씨가 되어 왔다. 어떤 학자들은 이 말이 신약성경에 한 번도 대두되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 적용시켜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좀 유치하다. 그러한 말은 없을지라도 거기에 관계된 말은 얼마든지 있다. 한 번은 베드로가 주님을 '멀찍이' 따라가다가 원수들이 피워 넣은 불을 쬐면서 주님을 몇 번이나 맹세코 부인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확실히 타락의 일로를 걷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독자가 이 말은 다른 말로 대체시킨다 해도 우리는 거기에 이의를 달지 않겠다. 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