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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성장 92] 영적인 쇠퇴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성장 (Spiritual Growth)

[영적인 성장 92] 영적인 쇠퇴

En Hakkore 2024. 4. 6. 21:21

둘째, 쇠퇴의 원인(2)

죄를 죽이는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은 자신을 쳐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진보는 시종일관 이것을 얼마나 오래 지속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가 회개할 때에 그리스도에게 바치기로 결심했던 것을, 그리고 세례받을 때에 마음 속에 다짐했던 것을 얼마나 집요하게 고수해 나가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가 참으로 회개했다면 세상과 육체와 마귀를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했을 것이다. 우리의 세례가 성경적인 것이었고 신자가 이 법의 영적이고 상징적인 의미 가운데 지혜롭게 들어갔다면, 그는 옛 사람을 벗어버렸을 것이며 그가 물에서 올라왔을 때에는 - 이는 마치 상징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은 것과같이 -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 당당히 걸어갔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을' 때에 그를 율법의 수여자요 지도자로 인정한 것과같이(고전 10:1,2),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로 옷입은 자들은(갈 3:27) 그의 깃발 아래 모여서 그의 유니폼을 입은 자들이다.♡

신자가 세례받을 때에 공적으로 고백했던 것과 일치된 삶을 살게 되면 거기에 따라 진정한 진보가 이루어진다. 그리스도는 그의 구원의 대장이 되시기 때문에, 그는 그에게 반대하는 모든 것들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

"산 자들은 이제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분을 위해 살아야 하느니라"(고후 5:15). 그러므로 성도는 매일 그의 삶을 새로이 해야 할 것이며 "그는 그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사신 바 되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삶을 영위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사신 바 되었다는 것을 그의 마음 속에 늘 새롭게 하면 할수록, 육체 죽이는 일을 보다 결정적으로 하는 계기가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것을 잠시라도 잊어버림으로, 주님의 미워하시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계 2:5).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시고 부활하신 것을 그가 세례받을 때에 고백하고 하나님께 헌신하였지만, 나중에 이것을 태만히 여기고 잊어버렸음에 기인한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중에 주님에게 기쁨이 되고 주님과의 친교를 누리게 되고, 나아가서 죄를 미워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의무감으로 충만해지고 그의 은혜에 지고한 가치를 두게 될 때에, 우리는 기쁨으로 의무를 감당하고 그의 영광을 위해 나아가게 된다.♡

우리의 마음 속에 그의 완전하심과 명령과 약속들로 충만하지 못하면, 다른 것들이 여기에 살짝이 들어와 우리의 마음은 조금씩 주님에게서 소원해진다. 그때 그는 더 이상 주님의 얼굴빛을 보지 못하고 어둠이 그 영혼 위에 드리우게 됨을 감지할 것이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고 감사가 없으며, 육을 죽이는 일은 귀찮아져서 마침내 그것을 포기하게 된다. 우리의 정욕은 점점 우세하여 제어하기 어렵게 되며 영혼의 정원에는 잡초로 무성하게 된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회개하여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길밖에 없다(계 2:5).

우리의 넘어지고 죄지은 것들을 통열히 회개하고 다시금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 바치는 길밖에 없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겠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말씀에 일치된 삶을 살지 못한다면, 확실히 실패자가 되고 만다. 만약 이 말씀이 그의 사상과 생활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면 결과는 비극에 이를 것이다. 사람이 신령한 양식으로 자라나지 못하고, 마음이 이 교훈으로 제어받지 못하고, 행위가 이 명령으로 인도함받지 못하면, 재앙은 반드시 이르고야 말 것이다.

우리가 주님께서 약속하시고 복주신 방법들을 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기대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뿐이다. 이것을 무시함은 그의 법도를 위반함이며 우리 자신의 선을 경시함이다.

내가 전과 다름없이 오늘도 성경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해도, 하나님과의 엄숙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렇게 하고 있단 말인가?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나의 방법이 보다 신령하지 못하다면, 나의 동기가 보다 가치있는 것이 아니라면, 타락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때 나는 하나님께 나를 소성시켜 달라고, 나의 욕구를 새롭게 해달라고 주님의 명령을 보다 잘 따를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신자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서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 신자의 마음 가운데 그리스도로 채워지지 않으면 그의 순금은 점점 빛을 잃을 것이다. 그가 주님을 아는 신령한 지식에서 자라나기를 중단한다면, 그와의 친교를 구하고 사모하는 일을 게을리 한다면, 그의 백성들에게 유익이 되는 충만한 은혜를 끌어오지 않는다면, 그의 모든 은혜에는 곧 금이 갈 것이다.♡

그를 의지하는 믿음은 약화 될 것이며, 그에 대한 사랑은 식어질 것이며 그에 대한 순종은 보잘 것 없는 것이 될 것이며, 그를 더욱 멀찍이 따라가는 결과에 이를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그의 말씀은 너무나 명백하여 조그만한 오류도 허용되지 않는다.

"저가 내 안에 내가 내 안에 있으면 과실을 많이 맺나니(그의 은혜는 힘을 얻고 그의 생명은 선행을 행함에 있어서 풍성하다) 나를 떠나서는 (나와 교제관계를 갖지 않고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요 15:5). 그리스도에게 나아오지 못하게 하는 이 요소들이 결국 끝까지 우리에게 붙잡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요소들에 주의해서 정신을 차리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갈라디아 5:6에서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했다. 이 믿음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는 믿음'(롬 10:10)이기 때문에 구원하는 믿음과 영적인 사랑은 서로 동떨어질 수 없다(비록 이 둘은 성격상 구분될 수는 있을지언정). 믿음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마음에서 작용하며 사랑은 그에게서 나온다.

이렇게 하여 믿음은 영혼 속에서 역동적인 능력을 발휘하며(토마스 찰머의 말을 빌리자면) "새로운 사랑을 향한 격동적인 능력"으로써 활동한다. 어린 아이는 더럽고 위험한 것을 갖고 놀기를 좋아하지만 그에게 맛있는 배나 복숭아를 준다면 그는 곧 이내 그것들을 팽개쳐 버린다.

중생하지 못한자는 세상에 속해 있고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가 그에게는 낯선 대상이기 때문에, 그의 마음과 생각은 세상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중생한 자는 새로운 성향을 가졌고 믿음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마음은 주님을 떠나지 않고, 이 세상의 시간과 감각적인 것들은 더 이상 그에게 매력을 주지 못한다. 이것은 세상을 정복하는 믿음, 영광스러운 것에로 향하여 활동하는 믿음인 것이다.♡

Arthur W. Pink 영적인 성장 p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