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4/04/09 (15)
En Hakkore
3. 인간이 하나님께 부적합하기 때문에 중생이 필요하다(1)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으며 신앙심이 깊은 바리새인인 니고데모가 어느 날 그리스도께 왔을 때, 주님께서는 그에게 분명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즉 이 땅에서 복음을 믿을 수도 없으며 하늘나라의 영광에도 참예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영적인 본성을 소유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영적 세계에 참여할 수 없다. 이 영적 본성만이 영적 세계에 속한 일들을 즐길 수 있는 적성과 자격을 부여해 준다. 그런데 자연인은 이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깨닫지"도 못한다(고전 2:14). 그는 그것들을 사랑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는다(요 3:19). 또한 의지..
2. 인간의 전적 부패 때문에 중생이 필요하다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다 타락한 자들이고 인간의 존재의 모든 부분은 죄로 인해 오염되어 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다(렘 17:9). 그의 마음은 사탄에 의해 혼미케 되었고(고후 4:4) 죄로 어두워졌으므로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다(창 6:5). 그의 성향은 변절되어 버려서 그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사랑하시는 것은 미워한다. 그의 의지는 선으로부터 떨어져 죄의 노예가 되어 있었고(롬 6:20), 하나님께 원수가 되었다(롬 8:7). 그에게는 의도 없고(롬 8:10) 그는 율법의 저주아래(갈 3:10) 있으며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이다. 그의 처지는 정말 비참하고 그의 경우는 절망적이다. 그는 아..
1.인간은 본래 타락한 자들이기 때문에 중생이 필요하다. 인류의 첫 시조가 타락한 결과로 인하여,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생명과 거룩으로부터 멀어지고, 맨 처음에 인간의 본성이 부여받았던 그 모든 완전함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태어났다. 에스겔 16:4,5은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될 때의 우리의 비참한 곤경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즉 우리의 인격이 싫어버린 바 된 상태와 자신의 더러움 속에서 뒹구는 상태 그리고 자신을 도울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에 던져지게 된 것이다. 처음에 인간의 영혼에 심어졌던 하나님의 "모양(likeness)"(창 1:26)은 희미해지고 하나님의 미워하는 바가 되었으며 피조물에 대한 무절제한 사랑이 그것을 대신해 버렸다. 우리 존재의 바로 그 원천은 오염되어 계속 쓴물을 내보냈..
중생(서론 2) 이 사실은 고린도전서 2:14에 분명하고 엄숙한 선언으로 확증되어 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이 자신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상상하고, 영적인 일들을 지적으로 이해한 것을 실제 경험으로써 얻은 지식인 양 잘못 생각함으로써 이 말씀의 핵심을 놓쳐 버린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것과 같은 신성한 진리의 외적인 지식은 지성을 매혹시키고 명상과 대화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지식은 마치 꿈 속의 즐거운 잔상이 깨었을 때는 아무런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 때는 아무 소용도 되지 못할 것이다. 신앙을 고..
중생(서론 1) 누구를 막론하고 아담의 타락한 후손들이 구원을 받는 데에는 두 가지 주된 장애가 있다. 즉 죄책과 죄의 형벌의 속박과 죄의 세력과 현존의 속박이 그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지옥에 속박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며 천국에는 부적당한 존재이다. 이러한 장애는 인간 스스로는 전혀 극복할 수 없다. 이것은 제자들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물었을 때에, 주님께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고 대답하신 그 말씀에 분명히 언급된 사실이다. 잃어버린 자 된 죄인이 자신의 영혼을 구하는 일보다 세상을 창조해 내는 일이 훨씬 쉬울 것이다. 그러나(주님의 이름이 영원히 찬송을 받을지어다)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계속하여 말씀하셨다(마 19:25,26)...
그리스도인의 성숙의 상태에 관한 몇가지 특징(2) 인내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성격상 생겨나는 자연적인 평온함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 안에 만들어졌던 영적인 은혜 사이를 구분해야만 하겠다. 여기서 우리가 또한 주지해야 할 것은 영적인 인내란 수동적인 면과 능동적인 면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수동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고난을 당하여서 묵묵히 즐겁게 순종함을 말하며 "그물에 걸린 영양같이"(사 51:20) 사납게 구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요 18:11)에서 보여진다. 능동적으로 말해서 이 말은 의무를 지속적으로 감당함을 말하며(히 12:1), "전쟁의 날에 후퇴하지"(시 78:9) 않음을 말한다. 이 말은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않는 것을"..
위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신앙의 진보를 가늠할 수 있는 일곱 가지 상이한 측면들을 알아 보았다. 다음에 전개되는 항목에서 우리는 다소간 근본적인 문제에 관계된다고 생각되는(그리스도인의 성숙의 상태에 관한) 몇가지 특징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사려깊음 잘 알려진 격언 하나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보통 사람들이 너무나 무시하기 쉬운 격언이다. "우리는 젊은 사람들의 어깨 위에 늙은 사람의 머리를 붙이지 못한다." 이 말은 자연적인 것인 만큼 또한 영적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배운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쉽사리 배우는데 이는 성경에서 가르침을 받느냐 고통스런 인생 체험에서만 배우느냐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