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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구원 3] 중생의 필요성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구원 (Doctrine of Salvation)

[영적인 구원 3] 중생의 필요성

En Hakkore 2024. 4. 9. 11:27

1.인간은 본래 타락한 자들이기 때문에 중생이 필요하다.

인류의 첫 시조가 타락한 결과로 인하여,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생명과 거룩으로부터 멀어지고, 맨 처음에 인간의 본성이 부여받았던 그 모든 완전함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태어났다. 에스겔 16:4,5은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될 때의 우리의 비참한 곤경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즉 우리의 인격이 싫어버린 바 된 상태와 자신의 더러움 속에서 뒹구는 상태 그리고 자신을 도울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에 던져지게 된 것이다. 처음에 인간의 영혼에 심어졌던 하나님의 "모양(likeness)"(창 1:26)은 희미해지고 하나님의 미워하는 바가 되었으며 피조물에 대한 무절제한 사랑이 그것을 대신해 버렸다.

우리 존재의 바로 그 원천은 오염되어 계속 쓴물을 내보냈으며, 그것이 비록 여러 줄기로 갈라지고 여러 갈래로 흐른다 할지라도 그것은 모두 짠물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며(잠 15:8) 그의 모든 형통함은 '죄'일 뿐이다.(잠 21:4)

오직 두 종류의 상태가 있을 뿐이며 모든 인간은 그 중 하나에 속해 있다. 하나는 영적 생명의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죄의 상태, 하나는 인간의 성향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반목의 상태, 다른 하나는 그 속에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의지에 반대되는 내적인 동기에 따르지 않으려고 하는 우정과 친교의 상태, 하나는 어둠이라고 불리우고 다른 하나는 빛이라 불리우는 상태이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중생하지 않은 때에는 어둠 속에 있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엡 5:8). 여기에는 중간 상태라는 것이 없다. 지금 이 땅위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 둘 중의 어느 한 편에 속하여 있다.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거나 그의 증오의 대상이다.

육에 속한 사람의 아주 자비롭고 훌륭한 일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그러나 은혜로부터 나오는 지극히 희미한 불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받아들일 만한 것이다.

타락함으로써 인간은 선한 것에는 부적당하게 되었다. 죄악 중에 출생하고 죄 중에 잉태되었기 때문에(시 51:5), 인간은 "모태로부터 패역한 자"이다(사 48:8). "그들은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한다"(시 58:3). 그리고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창 8:21).

인간은 교양이 있고 교육을 받았고 세련되었고 종교적이기조차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심히 부패" 하였다(렘 17:9).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지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 보시기에 사악하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마 7:18). 인간이 거듭나기 전에는 그들은 모두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들이다.(딛 1:16)

타락함으로써 인간은 선한 일을 자발적으로 할 수 없게 되었다. 타락한 상태에서의 모든 의지와 동기는 올바른 원리를 따르지 못하고 올바른 목적을 향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모두 죄악일 뿐이다. 인간을 제멋대로 놔두고 율법과 질서가 부여한 모든 제한을 풀어놓는다면, 거의 모든 설교자들이 증가하는 바와 같이, 인간은 급속히 짐승보다 못한 수준으로 타락하게 된다.

그러면 문명화된 나라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좀 더 나은가? 조금도 그렇지 않다. 인위적인 허식을 떼어내면 인간의 마음은 "물에 비취이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췬다"(잠 27:19)는 말씀과 같이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라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 언제나 엄숙한 사실로 남아 있다. 그리스도는 지상에 계셨을 때와 같이 다시 오실 때에도 "사람이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였도다"(요 3:19)고 똑같은 책망을 하실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주님께로 나아오려 하지 않을 것이다.

타락함으로써 인간은 선한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선한 일에는 부적당하고, 기꺼이 하려고 하지도 않을 뿐더러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자신의 이성에 들어맞는다고 진실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겠는가? 모든 사람은 자신의 아래로 잡아 끌고 악으로 향하게 하는, 즉 그것을 이기려고 애써 대항한다 해도 여러 형태를 취해, 다소간에 자신을 정복하고 마는 이상한 힘이 자신 안에 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친구들의 친절한 권고와 하나님의 종들의 충성스러운 경고, 고통과 슬픔에 대한 엄숙한 실례들, 여기 저기 널려 있는 질병과 죽음 그리고 자신의 양심의 호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굴복해 버리고 만다. 육신에 있는 [그들의 자연적인 상태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롬 8:8)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은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과 친교를 나눌 수 있기 전에 그 사람 안에는 근본적이고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할 절실한 필요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금 이 땅에는 저주가 내려져 있기 때문에 땅이 인간의 타락 이전의 상태와 같이 열매를 맺을 수 있으려면 완전히 변화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일반적인 죄악에 붙잡혀 있는 인간도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기 위해서"는 새롭게 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롬 7:4)

그는 다른 줄기에 접붙여지고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그의 부활의 능력에 참여해야 한다. 이것이 없이도 그가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열매는 아니다. 영적인 행동의 원리를 갖지 않은 이가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설 수 있겠는가? 영적인 생명을 갖지 않은 이가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겠는가? 잔인하고 악마같은 본성을 가진 이가 어떻게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할 수가 있겠는가?

Arthur W. Pink 영적인 구원 p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