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4/03/15 (15)
En Hakkore
노아의 성격은 창세기 6:9에서 세 가지로 묘사된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첫째로, 그는 "의인"이었다. 그는 그와 같은 이름으로 일컬어진 첫 번째 사람이었다. 의롭다하심의 공로적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이며(롬 5:9), 그것의 도구적 원인은 믿음이다(롬 5:1).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열다섯 명의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 사이에서 노아를 발견한다. 노아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은 믿음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한" 것으로 증명되었다(히 11:7). 둘째로, 그는 "당대에 완전한" 자였다. 이러한 언급은 노아와 그의 가족이 자신들을 네피림과의 접촉으로부터 지킴으로써 그 ..
노아의 계보에 대해서는 아주 조금밖에 언급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조상들의 자손이었던 사실은 충분하게 나타난다. 노아는 하늘로 옮겨진 에녹의 증손이며, 므두셀라의 손자며, 라멕의 아들이었다. 라멕은 아들이 태어나던 날 그 이름을 "노아"라 부르면서,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라고 말했다(창 5:29). 라멕이 믿음의 사람이었던 사실은 그가 "수고롭게 일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신" 것과 연결시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에게 그의 아들 노아를 통해 장차 당신이 이루시고자 하는 계획을 어느 정도 계시하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기 아들을 "위로"와 "안식"을 가져다줄 자..
이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것의 성격과 관련하며 마지막 두 가지 즉 그러한 동행의 시작과 절정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자.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창 5:21, 22).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기 이전에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는지 여부는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여기의 므두셀라를 선물로 받은 것이 그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로 이끈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이런 일은 매우 흔한 경우이다. 부모로서의 책임이 우리를 하나님에게 더 간절하게 매달리게 만들지 않는가! 므두셀라라는 이름은 에녹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았음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므두셀라는 "그가 죽은 후 그것(즉 홍수)이 임할 것이라"를 의미한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창 5:24). 여기에서 특별히 "동행"(walk)이라는 단어를 다시 한 번 주목해 보라. 이 한 단어가 이 사람의 삶과 성품에 얼마나 큰 빛을 비추는가! 또 그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계시하는가! 아담의 다른 모든 자손들과 마찬가지로, 에녹 역시도 본질적으로 진노의 자녀였고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창조주와 화해하는 날이 왔다. 그러면 그러한 화해의 원인은 무엇이었나? 히브리서 11:5이 그에 대해 답을 준다.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그러면 그는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나? 다음 절이 그에 대해 답해 준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6절). 그의 화해의 유효한 원인은 믿음..
에녹은 매우 특별한 사람이다. 그는 성경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언급되는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이 땅에서 살다가 죽음의 문을 통과하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또 그는 성경이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기록하는 유일한 - 우리의 복된 주님을 제외하고 - 사람이다. 또 그는 홍수 이전에 우리가 어느 정도 아는 극소수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유다서가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처럼, 에녹이 살던 시대는 매우 악한 시대였다. 그는 불경건한 사람들 가운데 홀로 서서 하나님을 위한 충성된 증인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 대한 기록은 매우 적은데, 이러한 사실 역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성경의 신적 영감의 또 하나의 증거이다. 성경이 단순히 사람의..
창세기 4장의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아담의 자손들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예배 노선을 따라간 것을 살펴보았다. 아벨은 믿음으로 예배하면서, 피의 희생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다. 반면 가인은 타락한 부모로부터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본질적으로 타락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무시하면서, 대속의 희생제물이 아닌 자신의 수고의 소산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다. 4장의 나머지 이야기는 불경건한 가인의 계열을 칠 대까지 추적한 연후에 하나님이 아벨을 대신하여 셋의 탄생 이야기와 함께 끝난다. 새로운 단락이 시작되는 5장은 셋의 계열을 추적한다. 특별히 여기의 장(章)이 시작되는 도입어는 매우 주목할 만하다. "아무개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라는 관용구는 창세기에 최소한 10회 나타난다(창 2:4; 6:9;..
아벨과 그의 제물이 모든 점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제물의 놀라운 모형인 것처럼, 아벨을 죽인 가인 또한 자신들의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인들의 놀라운 모형이다. (1) 가인은 "땅을 경작하는" 자였다(창 4:2). 이와 같이 성경은 그에 대해 말하는 가운데 제일 먼저 그를 땅과 연결시킨다. (2) 하나님이 요구한 어린 양을 가져오기를 거부한 것에서, 가인은 하나님이 은혜로 준비하신 제물을 배척했다. (3) 가인은 자기 의(self-righteousness) 가운데 자신이 선택한 제물을 가져왔다. (4) 그가 가져온 제물은 그 자신의 수고의 산물이었다. (5) 이러한 제물은 하나님에 의해 거부되었다. (6) 자신의 형제를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가인의 특권이었다(4:7) (7) 가인은 이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