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전체 글 (2616)
En Hakkore
앞에서 지적한 것들은 중생하지 못한 타락한 자들의 최상의 행위들이 하나님의 요구에 결코 부합된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자연인의 행위들은 하늘의 인준을 결코 받아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행위의 시작도 끝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들 행위의 원천이거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그 행위들의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 모든 것들은 부패한 심성으로부터 나온 것들이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과시에서 비롯된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물은 수면 위로도 올라 올 수 없으며 또는 산위로 흘러갈 수 없다. 깨끗한 냇물은 불결한 샘에서부터 흘러나올 수 없는 것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일 뿐"이다(요 3:6). 교육을 받고 정제되고 종교화된 육을 지닐 수 있다. 그러나..
성화가 신비성과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전자는 중생하지 못한 사람과 관련되는 것이요 후자는 중생한 자에게서 발생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연인에게는 감추어진 것이기에 그의 최상의 행실들이 그의 정직과 헌신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는지를 나타냄과 상관없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이유이다. 열매가 좋으려면 반드시 나무가 좋아야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다시 말해서 자신의 선행이 하나님께 옳다함을 인정받기 전에 먼저 자신의 상태와 본성이 하나님께 용납될 수 있는 것이라야만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달성할지에 대한 어떤 아이디어도 가지고 있지 못한 존재이다. 그것이 영적인 사람에게도 당혹스럽게 하는 것인데 어떻게 죄로 가득한 인간이 자신의 상태와 본성을 하나님께 받아드려질..
일반적으로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이 죄로부터 의롭게 변화되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전에 먼저 자신들의 상태가 변화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인식함이 없이 자신들의 삶을 개혁해보겠다고 나서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마치 태엽이 고장 난 시계인데도 그 시계 유리 표면을 깨끗이 닦고 뒷면을 광낸다고 해서 시계가 작동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 있는 자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것이 니고데모가 저지른 큰 실수였다. 그는 자신이 필요한 가르침이란 이렇게 겉만 번지르르한 것이었다. 그것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공의로운 걸음을 걷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에게 이렇게 선언하셨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하겠다는 것을 기이히 여기..
성경의 교훈은 모든 인간이 다 악하고 타락한 존재라는 것이다. 뿌리나 가지나 근원지나 곁가지나 심령이 다 부패하여 불순종의 삶을 사는 것만이 아니라 거룩하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수 있는 자가 못된다. 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를 잘 아신 주 예수께서는 인간의 마음 상태가 어떠한지를 그 역겨운 소굴의 실상을 명백하게 드러내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홀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1-23). 우리는 자신들의 삶과 연관하여 고백하는 성도들의 증언들이 언제나 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들 중에 몇몇은 성화가 무엇인지 또는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 성화가 내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을 가지고 부가적이고 불필요한 문제들을 만들어내어 문제를 더 극대화하는 자들도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필자도 그러한 사람들을 알고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가장 열렬하고 단호한 결심을 가지고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것 때문에 심한 좌절과 절망에 빠진 자였다. 그는 이 세상에 충분히 획득할 수 있다고 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속임 당하여 결국은 자살을 통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곤고한 심령을 마감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주목한 수천의 사람들이 그처럼 행동하지 않은 것이 그에게는 매우 이상한 일이었다. 문제들을 확대시킬 필요가 없다..
우리가 성화론의 문제를 거론할 때 하나님의 교훈하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희박한 개념들에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이라는 것을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성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 단어를 들을 때에 즉각적인 반발을 가지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만일 그것이 만족스러운 설명이 되지 못한다면)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잘 설명을 요하는 자들도 있기 때문이다. 성화나 혹은 어떤 것이든 그에 나타나는 문제들을 여호와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을 하는 짓이다. 전지하심은 결코 어떤 난제에 봉착하시는 법이 없다. 난제란 하나님께 있어서 하나의 긴급 상황보다 못한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의 한정된 이해력은 죄로 인하여 뒤죽박죽되었기에 거룩의 문제점은..
이제 그리스도의 중보적 실천은 그의 삼중직으로 진행된다. 그의 제사장직과 관련하여 즉각적인 효력은 만족과 화해이다. 그러나 그의 중보적 효력은 칭의와 성화이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거룩하지 않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어떤 증거도 없는 것이다. 주님의 선지자직과 관련하여 여기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뜻이 어떠한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님을 알게 하고 우리를 하나님께 복종하게 하신다. 그의 선지자적인 사역 시초에서부터 그리스도는 율법을 본래 그 율법의 순수한 목적에 맞게 회복시키셨다. 유대인들이 타락시킨 것에서부터 건..
2. 우리의 개인적인 거룩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거룩은 행위언약에서만 요구된 것이 아니라 은혜 언약에서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거룩의 의무를 느슨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도 없다. 가장 사소한 죄까지도 관용적으로 여기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복음은 율법보다 덜 거룩한 것이 아니다. 복음과 율법은 다 거룩하신 분으로 나온 것들이다. 비록 섭리는 죄인들의 수많은 죄를 다 용서하고 성도들의 불완전한 순종도 기꺼이 수용하는 것으로 준비된 것이라 할지라도 칭의의 기준이 완화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거룩의 의무를 어느 정도 감소시키는 어떤 것도 복음이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가장 작은 죄 정도는 용인할 수 있다는 기준저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언약의 차이는 두 가지이다. 행위 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