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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론 (Sanctification)

[성화론 22] 성화론의 문제점

En Hakkore 2024. 3. 25. 11:21

성경의 교훈은 모든 인간이 다 악하고 타락한 존재라는 것이다. 뿌리나 가지나 근원지나 곁가지나 심령이 다 부패하여 불순종의 삶을 사는 것만이 아니라 거룩하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수 있는 자가 못된다.

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를 잘 아신 주 예수께서는 인간의 마음 상태가 어떠한지를 그 역겨운 소굴의 실상을 명백하게 드러내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홀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1-23).

우리는 자신들의 삶과 연관하여 고백하는 성도들의 증언들이 언제나 다 이 하나님의 증언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된다.♡

다윗이 말하기를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욥도 자신의 사악함을 인하여 자신을 혐오한다고 외쳤다. 이사야 선지자도 외쳤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요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인 악함에 대한 고백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구약교회가 인식하고 있는 것에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내용은 모든 성도들이 자신들의 본래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말할 때마다 언급하는 문장이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이 문장은 아주 강력한 문구이지만 타락이 우리를 빠뜨린 진흙탕 속을 강렬하게 묘사하기에는 조금도 부족하다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칭의론을 염두해 두고 인간의 자기 의지와 불법 및 불순종이 전부인 입장에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공의한 자가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인간의 부정함과 더러움의 측면에서 볼 때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끄집어 낼 수 있으리까?(욥 14:4)라고 문의하게 되는 성화론은 그에 못지않은 교훈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비인간적인 존재로 혹은 우리 자신이 아닌 존재로 만드는 것보다 더 거룩하게 만들 능력이 전혀 없다. 우리가 바람을 명령하거나 지시하는 것보다 우리의 심령을 깨끗하게 만들 능력이 없다. 죄가 지배하는 것은 마음의 재앙이다(왕상 8:38).

전염병과 같은 재앙만큼 치명적인 질병은 없다. 그러므로 심령의 부패만큼 치명적인 재앙은 없는 것이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교만한 자는 자신을 겸손한 자로 만들 수 없다.

육적인 사람은 스스로를 영적인 사람으로 몰아갈 수 없다. 땅에 속한 자는 자신이 태양을 뒤로 물러가게 하거나 땅을 하늘로 솟게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자신을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변형시킬 수는 없다. 성화는 전적으로 인간 본성적인 능력을 뛰어넘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사실을 오늘날 너무나도 잘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

심지어 자신을 정통적인 사람으로 간주하는 설교자들 사이에서도 타락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 중에 극소수만이 타락의 비참한 역향과 그로 인하여 확장된 참상을 인식할 뿐이다. 한 대중적인 찬송 시에 있는 '타락에 의해서 손상된 것'이라는 가사는 그 진리를 지나치게 부드럽게 묘사하고 있다. 실로 전적으로 잘못 기술하고 있다.

모든 인간이 첫 언약을 깨트림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게 되었고 그래서 지금은 악마의 형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요 8:44). 그들의 모든 기능들이 다 부패하여 생각하거나 말할 수 없고(고후 3:5) 진정으로 선한 일을 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일을 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본질상 거룩하지 않으면 부정하고 역겨운 존재요 가증스러운 자들이다. 그들의 심령이 그러하며 그들의 삶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심령을 바꾼다는 것은 그들의 능력 밖의 일인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들과 하나님 사이의 영적인 관계를 섬겨온 율법의 저주가 그들에게 임하여 하늘과 함께 하는 모든 교제와 교통함이 단절되게 하였다. 우리의 첫 부모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그 입구에 스랍들이 화영검을 들고 지키고 서 있게 되었다.

즉 공의 측면에서 그들은 그들에게 도달하는 성결케 하는 영향력들을 다 상실해 버린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 자신과 함께 교제하거나 또는 하나님을 닮게 하는 최고의 역량이었다. 그러나 저주가 하나님과 타락한 피조물 사이에 고정되어 있게 되었으며 성결케 하는 영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와 그들에게 미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거룩하지 못한 간청이나 기도가 하나님께 도달 할 수 없는 것만큼이나 그들에게 미치지 않게 되었다.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잠 15:8)고 기룩하고 있다. "또 "악인의 꾀 역시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26절)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성화가 우리의 칭의보다 덜 신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은 옳다(토마스 보스톤). 인간본성의 타락이 이 세상에서 결코 피해갈 수 없는 명백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이 다 그 문제 해결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이성적인 기능들을 옳게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문제 해결을 풀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도덕적 가치라는 이름으로 보여지는 성화의 외관적인 모습뿐이었다. 허나 빛이신 주님의 요구사항에 비추어볼 때 사람들의 눈이 하늘의 빛으로 뜨게 되니 자신들의 도덕적 가치가 더럽고 낡은 옷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람이 중생하기 전까지 그리고 심령 속에서 은혜의 원리가 작용하는 행동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인간의 모든 행위들은 마치 원숭이가 사람 흉내 내는 것과 같이 진짜 순종과 경건의 흉내 내기에 불과한 것이다.

Arthur W. Pink 성화론 p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