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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론 24] 성화론의 문제해결(1) 본문

성화론 (Sanctification)

[성화론 24] 성화론의 문제해결(1)

En Hakkore 2024. 3. 25. 11:23

성화가 신비성과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전자는 중생하지 못한 사람과 관련되는 것이요 후자는 중생한 자에게서 발생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연인에게는 감추어진 것이기에 그의 최상의 행실들이 그의 정직과 헌신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는지를 나타냄과 상관없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이유이다.

열매가 좋으려면 반드시 나무가 좋아야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다시 말해서 자신의 선행이 하나님께 옳다함을 인정받기 전에 먼저 자신의 상태와 본성이 하나님께 용납될 수 있는 것이라야만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달성할지에 대한 어떤 아이디어도 가지고 있지 못한 존재이다.

그것이 영적인 사람에게도 당혹스럽게 하는 것인데 어떻게 죄로 가득한 인간이 자신의 상태와 본성을 하나님께 받아드려질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 속에 부패한 것으로 넘쳐나는 인간이 어떻게 자신을 거룩한 자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그러한 문제들을 우리가 차례로 다루고자 할 때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능히 풀어갈 수 있도록 기꺼이 도와주시리라 믿는다.♡

자연인은 성화의 신비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한다. 비록 그가 양심의 찔림으로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거나 또는 천국에 가고자 하는 욕망이 있어서 내주하는 죄악의 왕성한 활동들을 극복하고자 하며, 해야 할 모든 의무를 열렬하게 달성하는 몸부림이 있을지라도 자연인의 모든 행위들이 다 하나님께서 수용하실 수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의 상태가 먼저 변화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 문제는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한 상태에서 그의 행위가 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것이 되느냐 아니냐를 논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그 일을 진척시켜가는 원칙들이 문제인 것이다.

자연인의 양심도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종교적인 교훈들이 자연인도 옳은 것을 행하고 잘못된 것은 피할 수 있도록 학습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위들은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그리고 즐거이 순종하는 정신으로 하는 것들이 아니다. 단지 두려움과 무서워하는 정신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일반적으로 태양열을 받아 익어가는 열매라기보다 온실에서 자란 열매로 예술로 승화된 것과 같은 자들이다.

"경계(율법)의 목적(의도)은 정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는 사랑이거늘"(딤전 1:5). 이것이 하나님의 계명이 요구하는 것을 행할 수 있는 바탕이다. 그러한 행위들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의 계명들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다. 그 계명 순종함이 그의 선하심 때문에 즐거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준행하는 것이다.♡

믿음이 주님의 약속을 받아 복이 되도록 수용하는 것이다. 그러한 질적인 요소들을 포함하는 것이 되지 않는 한 천국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행위들은 없다. 의무감은 양심을 움직이나 무관심한 정서는 마음을 멀어지게 한다. 믿음의 실천은 행동을 지시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내가 왜 이런 일을 하지? 라고 자문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해야 한다. 만일 그 질문을 더 파고든다면 왜 그 일에 그토록 열의와 정성을 다해야하는 거지? 그에 대한 답 역시 하나님께서 내게 최선을 다할 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동일한 자세로 영광을 돌리기 원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순종은 하나님의 권위를 세워드리며, 사랑, 그의 친절을 인정하는 것이며 믿음은 그의 호의와 상급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전 10:31). 만일 우리의 행위들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되려면 이것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한시적인 의무들을 수행하는 것이든 아니든 사랑과 친절의 행위들, 혹은 경건과 헌신의 행위들은 이 목적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계시된 뜻에 부합하는 길을 갈 때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자연인은 절박한 상태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열렬히 부르짖는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원하는 것을 해소함 받고자 하는 부르짖음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재원들을 어려운 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자발적으로 기부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할 뿐이다(마 6:2).

사람들은 안식익에 종교적인 모습을 과시한다. 공 예배에 참석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그들의 불안한 양심을 만족시키고자 하거나 그로 인하여 천국에 들어갈 소망을 얻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할 뿐이다.

Arthur W. Pink 성화론 p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