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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 Hakkore
여호수아의 그 안타까운 언어에 놀랄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우리 자신의 변덕스러운 마음을 보고 "나를 붙드소서"(시 119:117) 라고 외쳐야 할 절박한 처지를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겼더라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이것이 "건전한 사고"에서 나올만한 발언이 아니었다는 것이 너무도 확실하다. 그것도 여호수아처럼 광야에서의 일들을 경험한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말은 더 더욱 아니었다. 그는 그분의 민족의 한 세대 전체가 광야에서 불만족을 표시하고 거듭거듭 애굽의 식물들을 탐하는 것을 목도했었다. 그런 소원을 표명한다는 것은 과연 어리석음의 극치였다. 더욱이 그것은 "만족"의 문제가 전혀 아니었다. 그들이 광야를 떠난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일이었지, 그들 자신이 불만족했기..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수 7:7). 이것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바로 앞에서 대면하고 있는 자의 언어라니, 그럴수는 없다. 오오, 사랑하는이여! 여호수아서가 사람이 꾸며낸 역사였다면, 그런 말도 안되는 비정상적인 일을 거기에 기록해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진솔한 삶의 기록이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성도가 체험으로 이런 심정을 안다. 조금 전에는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졌었는데"(수 6:27).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대하시는 것에 대해 원망하여 스스로를 욕되게 한다. 전에는 낮추는 자세였는데, 지금은 자기의 뜻을 강변하는 언사를 내뱉는다. 야곱은 르우벤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가 물이 끓..
여호수아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요단 강을 건너게 하신 것이 여호와이셨음을 시인하고서, 그가 그렇게 하신 것이 오로지 그들을 이교도들의 손에 멸망당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느냐고 물었다. 언제나 그렇다. 이 세상의 지혜자들은 믿음의 자녀들을 쉽사리 믿어버리는 단순 무식쟁이들로 바라본다. 하지만 사실은 그들 자신이 그런 단순무식쟁이들이다. 성경 말씀을 믿는 것만큼 합리적인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많은 틀림없는 증거들"에 의해 입증되는 하늘로부터 온 계시를 거부하고, 절대로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통해 확인되는 것을 지성이 아니라 미친 것의 표지라며 욕하는 자들처럼 비합리적이고 억지를 부리는 자들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불신앙을 용인하면 그..
필자나 여러분이나 모두 여호수아처럼 그렇게도 존귀한 인물의 이러한 실패를 대하면서, 우리의 연약함을 인식하고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행하고 그분을 붙들어야 한다는 것을 깊이 절감하게 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주께서 지탱시켜 주시지 않을 때에 그 믿음이 얼마나 속히 무너지고 마는지를 이처럼 실례를 통해 배우게 된다. 문제는 여호수아의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그 분명하고도 확실한 약속들에 가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 육신적인 이성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았고, 보이는 것으로 행하였기 때문이다(참조. 고후 5:7). 그는 아이성에서 패배를 당하고서, 그것이 완전한 패배의 전조(前兆)라고 경솔하게 결론지었다, 불신앙은 올바른 균형 잡힌 안목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 삼천..
2. 회개하는 지도자의 기도 앞에서 우리는 아이성에서 이스라엘이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후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려 기도한 사실을 살펴보았다. 거기서 그는 옷을 찢고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 쓴 채 엎드려 스스로를 책하며 낮추었다. 저녁 제사 시각까지 그는 하나님께 입을 열었다. 아마도 그는 이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분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시 142:2). 여호수아의 기도는 설교자들과 저술가들이 거의 상세히 다룬 적이 없는 내용을 제시해 준다. 우리 마음이 정리되어 있고 영적인 자세를 갖추었을 때에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식의 생각은 잘못이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자비"를 구하며, 깊은 고뇌 중에 있을 때에 흐느끼며 우리의 슬픔을 토로..
이 절을 넘어가기 전에 또 다른 각도에서 그 중심인물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얼굴을 묻은 것이 신인이신 구주 예수님을 다시 한 번 모형으로 그려주지 않는가? 지금 여기서 여호수아가 슬피 울며 자복하고 있는 문제, 곧 아이성에서의 재난의 근본 원인이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탈취한 범죄였다는 점을 기억하면, 여호수아의 겸비함이 겟세마네에서의 구주 예수님의 고뇌를 엄숙하게 미리 모형으로 보여 준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은 그분의 고난의 절정에 이르러 그 백성을 위한 보증물로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위해 "저주가 되실 즈음"에,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해 준다(마 26:39). 그런데 여기서 여호수아가 바로 그 다음에 한 일..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2(마 6:19-21)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이 구절의 하반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소유물이 부패하기 쉽고 불확실하다는 이유를 들어 그의 명령을 강조하셨다. 여기에서 그는 우리에게 피조물의 본질과 그 남용에 관하여 말씀하심으로써 피조물의 무상함을 가르쳐 주신다. 금과 은, 그리고 모피와 비단이 아무리 순수하고 값비싼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은 녹이 슬거나 좀 먹기 쉽다. 아무리 주의 깊게 간수한다 할지라도 도둑이 와서 그것들을 빼앗아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왜 이처럼 무상한가" 라고 어느 누가 묻는다면 그 대답은 다음과 같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으로 그렇게 만드신 것인데(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