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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 Hakkore
우리의 존재가 이처럼 복되신 삼위 하나님의 결속된 역사하심으로 인한 것이다.♡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바가 아니냐(말 2:10)" 아들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욥기 33:4절은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고 하였다. 같은 방식으로 신자들의 '영생'도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속한 것으로 구별되어 언급하고 있다. 로마서 6:23절은 성부 하나님의 은혜로 말하고 있고 요한일서 5:11절은 영생이 아들 안에 있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으며 동시에 갈라디아서 6:8절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우리의 성화의 저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이라는 칭호가 특정한 분을 의미하는 획일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 '하나님'은 삼위 중 첫 위격에 해당되기도 하고 때로는 제 2위를 나타내기고 하며 때론 세 번째 위를 나타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5:28절과 같은 다른 구절들에서는 하나님이 삼위 하나님 모두를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영원하신 삼위 각각은 자신의 독특한 지위를 가지고 있거나 혹은 교회의 성화와 관련하여 각각의 역할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해서 명확한 견해를 가지기를 원한다면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는 그 단계에 도달했다고 본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성화와 관련하여..
거룩의 모든 근원과 원천은 하나님 자신뿐이다.♡ 거룩의 출처는 지음을 받은 피조물에게는 전혀 없다. 오직 거룩하신 분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사람을 만드셨을 때 인간은 그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자였다. 즉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것이다(엡 4:24, 골 3:10). 피조물은 생명을 창조하려는지 몰라도 자신의 거룩은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타락한 피조물, 죄로 인해 부패되었고 노예가 된 자신을 스스로 어떻게 거룩하게 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에디오피아 사람이 자신의 피부색을 바꾼다든지 혹은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하게 하는 것이 한센 병 환자가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보다 더 쉬울 수 있다. 인간의 ..
3. 정결함과 성화(purification and sancitification) 이 둘은 결코 일치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분리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뚜렷이 구별되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조지 스미톤 목사의 글을 인용하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다고 본다. 그 두 단어는 이스라엘의 의식법에 종종 등장한다. '거룩케 하다, 정결케 하다'라는 말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동의어로 말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 둘 사이에는 약간의 구분되는 것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제사의식에서 더럽혀지는 것이 재발하는 제물은 제거되게 되어 있는데 정결케 하다는 말은 그러한 의식들과 제물들에게서 더러운 오점들을 제거하는 일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더러운 오점을 지닌 예배자들은 하나..
2. 칭의와 성화 칭의와 성화의 관계는 로마서 3장에서 8장까지 명확하게 나타나있다. 로마서는 신약성경의 위대한 교리적 서신이다. 5장에서 우리는 믿는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선언하는 것을 발견한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그의 은혜 안에서 서로 마주대하며 사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고 끝까지 지키심을 받으며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안에서 즐거워하는 삶을 산다. 그러나 이러한 복들이 참으로 놀라운 것들이지만 깨어 있는 양심은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함을 절감하는 것이다. 즉 우리 속에 내재해 있는 죄의 권능과 오염으로부터 건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로마서 6장과 7장에서 길게 다루면서 근본적으로 성화의 다양한 측면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첫째로 신자는 법정적으로..
1. 중생과 성화 이것은 중생에 대한 글을 비판적으로 읽은 자들과 성화의 특질을 다룬 글들을 세밀하게 따르는 자들에게 부각되는 주제일 것이다. 즉 우리는 중생할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과 성화에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 사이의 진짜 차이가 무엇인지를 전부는 아닐지라도 거의 대부분 다루지 않았다. 그 둘 사이를 구분 짓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많은 것들이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선을 긋고자 한다면 그 주도적인 차이가 무엇인지를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 두 세 단락에서 이 점을 다룰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각각의 관계성을 부각시키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 말미암아 이 문제를 고려하는 일에 도움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
앞서 이미 말했던 것과 비교하면서 신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을 숙고해 봄은 자못 흥미롭고 유익하다. 모세 시대에 일어났던 일들을 유년 시절에 해당하며 이는 "때에 따라 아름답게" 되어진 것이다. 그러나 "때가 찼던" 지금 그러한 것들은 아주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유치원 시절에, 하나님께서는 감각에 호소할 수 있고 그림이나 상징으로 가르칠 수 있는 정교한 의식을 제도로 세워 놓으셨다. 거기에는 울긋불긋한 성막이 있었고 거창한 제사장의 예복, 향단, 악기의 연주가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특색있는 의미로 부각되었으나 본체가 나타났을 때 그것들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그들은 구식이 되어 버렸고, 그러한 것들을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에 부합시킨다는 것은 합당치 않는 유년 시절로 퇴보함을 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