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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실천 4] 그리스도인의 출발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실천 (Practical Christianity)

[영적인 실천 4] 그리스도인의 출발

En Hakkore 2024. 4. 17. 10:46

제 1장 구원에 이르는 신앙(이 신앙의 모조품들 3)

그 분의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것보다 뛰어난 것이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이 유다 왕 아비야이다. 여로보암이 그의 군대를 이끌고 그와 맞섰을 때에 아비야가 역대하 13장에서 한 말의 내용은 무게가 있고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먼저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소금 언약으로"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사실을 상기시켰다(5절). 다음으로 그는 그의 대적 여로보암의 죄악상을 낱낱이 열거하였다(6-9절). 그리고 그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하나님"이신 것과 여호와께서 자기와 및 그의 백성들과 함께 계심을 확실시하였다(10-12절).

그러나 여로보암은 그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전쟁을 강행했다. 그 결과 "아비야와 그 백성이 (그들을) 크게 도륙하였는데..." 그것은 저희가 그 열조와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다(17,18절). 그런데 이 아비야에 대해서 말하기를 "아비얌이 그 부친의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거듭나지 못한 사람도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 있고, 또한 그의 약속을 의지하며 그의 언약을 주장할 수도 있다. 이방 사람인 니느웨의 백성이 하나님을 믿었다(욘 3:5). 이것은 매우 충격적인데 왜냐하면 하늘의 하나님은 그들에게 낯선 분이었고 하나님의 선지자는 그들에게 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 선지자가 전하는 메시지를 믿을 수 있었을까? 더욱 믿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 메시지가 믿어야 할 약속이 아니라 일종의 위험이었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이 무시무시한 위협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복음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약속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것은 얼마나 더 쉬운 일인가!

"위협의 메시지를 전하면 많은 반대에 부딪치는 경향이 있다. 그 반대는 안과 밖 양쪽에서 일어난다. 안으로부터는 위협의 메시지를 그 속에 죽음의 쓴 맛이 담긴 쓰디쓴 알약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래서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밖으로부터는 사단이 반대를 조장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사단은 위협의 메시지가 사람들을 일깨워 자신들의 비참상을 깨닫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현재의 비참한 상태를 벗어날 방도를 궁리할까봐 두려워 한다. 사단은 위협의 메시지가 사람들을 평화와 행복의 몽상에서 깨울까봐 그들이 사단의 아가리 안에서 잠자고 있는데도 안전하다고 확신시키며 위협의 메시지를 멀리하도록 공작한다.

그러나 약속의 메시지를 전하면 일반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도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 사람 내부에서도 반대가 일어나지 않는데 왜냐하면 약속은 매우 달콤하고, 또 자비와 영생을 약속함이 바로 복음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약속의 메시지를 탐욕스럽게 삼켜버리려고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사단도 직접적인 반대를 일으키지 않고 사람들이 차라리 약속의 메시지에 대해 흥미를 갖지 못하도록 공작한다. 왜냐하면 이 방법이야말로 사람들은 그를 본래의 상태에 묶어두고 정주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단은 약속의 메시지를 악용하여 확신시킨 후 무덤을 인봉해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니느웨의 사람들이 보여주었듯이, 사람들이 받아들이기가 더욱 어려운 위험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런 반대와 어려움이 없을 때 복음의 약속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데이빗 클락슨, 1680년, 그는 존 오웬과 얼마동안 협동목사로서 동역했었는데, 죤 오웬에게는 우리가 위의 내용의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다)

비록 구원에 이르는 신앙은 아니지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를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잠깐 믿다가... 배반하는" 돌짝밭 같은 사람들이다(눅 8:13). 주님께서는 이 부류의 사람들에 관하여,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하셨다(마 13:20).

우리는 이런 사람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 그들은 밝은 표정으로 행복감에 젖어 있는 영혼들이며, 충일한 정신의 소유자이며, 또한 자기들이 발견한 지상의 행복 세계로 다른 사람들도 들어가도록 애쓰는 열심덩어리들이다. 이런 사람과 순수한 그리스도인들, 즉 좋은 밭의 사람들을 가려내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둘 사이의 차이점은 명백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그 차이점이 속에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속에는 뿌리가 없는데(마 13:21).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깊이깊이 파보아야 한다. 독자들이여, 당신들은 당신들 속에 "일의 뿌리"(욥 19:28)가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당신 자신을 엄밀히 조사해 본 일이 있는가?♡

Arthur W. Pink 영적인 실천 p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