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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구원 9] 중생의 성격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구원 (Doctrine of Salvation)

[영적인 구원 9] 중생의 성격

En Hakkore 2024. 4. 9. 11:31

3. 인간이 하나님께 부적합하기 때문에 중생이 필요하다(5)

주 예수께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요 3:6)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을 유전받았으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부적당할 뿐만 아니라 이 부패한 본성은 부패 그 이상의 어느 것도 결코 될 수 없으므로 어떤 문화도 그 타락한 본성을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하도록 개조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고 계신다.

그 타락한 본성과 그의 표현은 교육과 환경에 의하여 제한되고 수정되어질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죄에 물든 성향과 감정은 여전히 남아있다. 썩은 나무는 아무리 가지를 쳐주고 다듬어준다고 해도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좋은 나무를 갖든지 아니면 다른 나무에 접붙여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계속하여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중생의 성질에 관하여 생각해 보도록 이끈다.

우리는 이제 이 주제의 가장 어려운 부분을 다루게 된다. 그 이유는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주 신비로운 것이며 그것에 관해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말씀 속에서 계시하신 것 외에는 정말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자신이 하신 일에 관하여 말씀하셨던 것을 곰곰히 생각해 보려 애쓸 때에 부딪치기 쉬운 두 가지 위험에 대해서 조심해야 한다.

그 첫째는, 우리의 생각을 어떤 고립된 진술이나 혹은 그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성령께서 사용하신 어떤 하나의 비유에만 제한시키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이 사용하셨던 비유들을 통속적으로 생각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추론해 내는 것이다. 영적인 일들을 언급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원래 인간들이 물질적인 일들을 표현하려고 의도하였던 용어들을 사용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언어로서 표현된 하나님의 뜻을 잘못되게 풀이하지 않는가를 끊임없이 조심해야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각각의 주제에 대하여 말해진 모든 것을 자세히 비교한다면 이런 위험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중생의 성격을 연구함에 있어서 특히 최근에는 그에 관한 많은 오해를 유발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신생'(New Birth)일는 한 가지 독특한 표상에만 자신의 주의를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신생'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자신과 친교를 나누기에 합당한 존재로 만들기 위하여 그들 안에서 역사하실 능력있고 기적적인 일을 나타내기 위하여 성경 안에 나타난 여러 표현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골로새서 1:12,13은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말함으로써 똑같이 생명의 경험을 전달해 주고 있다.

중생은 새로운 경험의 시작이고, 이 경험은 아주 실제적이고 혁명적이어서 이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자에 대해서는 새로운 피조물, 즉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고다"(고후 5:17)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새로운 영적 생명을 영혼에게 나누어 주셨으므로, 그것을 받은 사람은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 심어진 것이다.

중생의 성격은, 그것을 최초의 타락시에 일어났던 일과 비교하고 대조해 봄으로써 아마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새로와진 사람이, 아담이 반역함으로 인해 잃었던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받지만 실상 그것은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기 때문이다.

타락하였을 때 인간은 어떤 기능도 상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영과 혼과 몸을 주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3부분으로 구성된 존재이다. 인간이 타락하였을 때,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신 거룩한 경고는 당연히 실행되어, 사람은 영적으로 죽었다.

그러나 이것은 영이나 혼, 혹은 다른 부분이 소멸된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은 결코 소멸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 그것은 분리의 상태를 의미한다. 탕자는 먼 나라에 있었을 때 '죽은' 상태였다(눅 15:24).

왜냐하면 그는 그의 아버지와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다"(엡 4:18)는 말은 중생하지 않은 사람의 두려운 상태를 표현한 말이다. 그러므로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은 것이다"(딤전 5:6). 즉 죄 속에서 살면서 영적으로는 죽었고 하나님을 향하여 죽어있는 것이다. 즉 영과 혼과 몸, 이 각각의 존재는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반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최초의 타락시에 일어났었던 일은 인간의 3중적 존재의 어느 부분이 파괴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타락하고 부패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람 안에 어떤 새로운 원리인 죄가 들어온 것인데 그것은 실제적이라기보다는 질적인 어떤 것이다.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은 죄로 물든 '본성'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구체적인 실체가 아니라 그보다는 어떤 실체나 피조물을 특정지우고 행동하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해 말할 수 있다. 잡아끄는 것이 중력의 성질이고, 부는 것이 바람의 성질이며, 타는 것이 불의 성질이다.

'본성'은 만져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작용의 원리, 즉 행동으로 추진시키는 힘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타락한 인간은 '죄에 물든 본성'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인간의 영이나 혼과 같은 어떤 실체적인 것이 그의 존재에 덧붙여졌다고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 대신에 악의 원리가 그에게로 들어가, 마치 서리가 과일 속에 들어가 그 과일을 망치듯이,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부분을 오염시키고 더럽혔다고 이해해야 한다.

Arthur W. Pink 영적인 구원 p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