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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20] 타락 2 본문

강해시리즈/창세기 강해 (Gleanings In Genesis)

[창세기 강해 20] 타락 2

En Hakkore 2024. 3. 14. 10:46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3;21).

이러한 구절을 상세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많은 지면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만 부득이 우리는 간략한 설명으로 만족해야만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죄인의 구원과 관련한 상징적인 그림을 제공해 준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말씀으로가 아니라 상징과 행동으로 하신 첫 번째 복음 설교이다.

그것은 죄인이 거룩하신 창조주에게로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는" 근본적인 진리를 최초로 선포하는 것이었다(히 9:22). 그리고 그것은 죄인을 위해 무죄한 자가 대신 죽는 대속(代贖)의 원리를 보여주는 예화(例話)였다.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은 죄의 삯을 규정하셨다.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2:17).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의로운 재판장으로서 그는 의를 행하셔야만 한다. 그의 율법은 깨어졌으며, 그로 말미암아 공의는 그에 합당한 형벌을 시행할 것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긍휼이 공의의 입을 막았다. 은혜와 의가 함께 나타날 수 있는 방법이 없는가? 감사하게도 있으며, 또 있었다. 긍휼은 죄인에게 형벌을 내리기보다 은혜를 베풀기를 원했다. 그러나 공의가 죽음을 요구했기 때문에, 다른 존재가 죄인을 대신해서 죽음을 당해야만 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 주셨다. 가죽을 얻기 위해, 동물이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생명이 취하여져야만 했으며, 피가 흘려져야만 했다. 이런 방법으로 타락과 멸망 가운데 떨어진 죄인의 수치를 가려줄 옷이 준비되었다.

여기의 상징의 의미는 너무나 명백하다. 여기에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그림자처럼 나타난다. 주 예수께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으셨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은 의로우시면서 동시에 예수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실 수 있게 되었다. 여기의 상징은 얼마나 완전하며 아름다운가! 가죽을 준비하고, 그것으로 옷을 짓고, 그 옷을 우리의 첫 조상들에게 입혀 주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었다. 💕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하셨다. 그들은 전적으로 수동적이었다. 이와 동일한 진리가 탕자의 비유 가운데 나타난다. 탕자가 비참한 상태에 빠진 가운데 자신의 죄를 시인했을 때, 아버지의 은혜가 나타났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눅 15:22).

탕자는 스스로 옷을 준비하지 않았고, 스스로 그 옷을 입지도 않았다. 다만 모든 것이 그를 위해 준비되었다. 이것은 모든 죄인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노래할 수 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 61:10) 💕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이것은 최초의 죄에 대한 신적 유죄판결의 절정이었다. 판결은 제일 먼저 뱀에게, 다음으로 여자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자에게 선언되었다. 하나님이 긍휼 가운데 아담과 하와에게 보배로운 약속을 주신 연후에, 그들은 낙원으로부터 쫓겨났다. 이것의 도덕적인 의미는 명백했다.

그들이 에덴 동산에 남아 하나님과 더불어 계속 교제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거룩하시다. 그러므로 부정한 것은 그 앞에 설 수 없다. 죄는 항상 분리의 결과를 낳는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2).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경고가 이루어진 것을 발견한다. 하나님은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경고하셨다(2:17). 이것은 단순히 육체적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 그것보다 무한히 더 나쁜 - 영적으로 죽는 것이다. 육체적 죽음이 몸으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것인 것처럼, 영적인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다.

"네 동생은 죽었다가(나로부터 분리되었다가) 살아났으며 (회복되었으며)"(눅 15:32).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허물과 죄로" 죽은 것은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기 때문이다(엡 2:1, 4:17).

마찬가지로 죄 가운데 죽은 모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법정적인 죽음은 많은 사람들이 잘못 가르치는 것처럼 단순히 멸절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어 불못 가운데 영원히 던져지는 것이다. 여기의 창세기 3장에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정의(定義)를 보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으로서, 사람이 에덴 동산으로부터 쫓겨나는 것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영적 진리를 보여 준다. 종종 생명나무는 신적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나타난다(잠 3:18을 보라). 타락한 인간이 그 나무에 나아갈 권리를 갖지 못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서 있는 도덕적인 먼 거리를 강조한다.

성막과 성전의 휘장이 신적 임재로 들어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죄인은 하나님에게 나아가지 못한다. 공의의 칼이 그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송축할지니, 우리 앞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을 여신 그리고 그 자신이 길이신 자가 계신다(요 14:6). 💕

그 길은 어떻게 열렸는가? 공의가 스스로 자신의 칼을 거두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도리어 공의의 칼은 우리 구주의 옆구리를 찔렀다. 스가랴 13:7의 "칼아 깨어서 내 목자를 치라"는 말씀은 의심의 여지없이 여기의 창세기 3:24을 되돌아본다.

목자가 칼에 찔림으로 양들의 생명이 보존되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낙원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될 것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

본장의 내용을 요약해 보자.

"타락과 하나님"을 다루는 본장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발견한다. 첫째로 사람을 찾아오신 것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겸비(謙卑), 둘째로 복된 예언과 약속을 주신 것에 나타나는 그의 긍휼, 셋째로 사람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준비하신 가죽옷에 나타나는 그의 은혜, 넷째로 사람의 죄를 징벌하신 것에 나타나는 그의 거룩하심,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죽옷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의 절실한 필요. 💕

Arthur W. Pink 창세기강해 p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