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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17] 타락 1 본문

강해시리즈/창세기 강해 (Gleanings In Genesis)

[창세기 강해 17] 타락 1

En Hakkore 2024. 3. 13. 11:06

3. 타락과 인간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 타락의 첫 번째 결과는 그들의 수치가 실현된 것이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 알고"(7절). 죄를 통해 사람은 전에는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 최소한 작용하고 있지 않았던 것 - 즉 선과 악을 아는 양심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타락하기 전에는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었다.

사람은 무죄한 상태로 창조되었는데, 무죄함은 악을 알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지된 열매에 참여하자 마자 사람은 자신의 악(惡)을 의식하게 되었으며, 눈이 열려 자신의 타락한 상태를 보게 되었다. 양심 혹은 도적적인 본능은 이제 인간의 공통적인 본성이 되었다.

인간은 자기 안에 자신의 타락을 증언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양심이 창조주의 작품임을 보여 주는 한 가지 분명한 표적이다. 양심은 사람이 만들 수 없다. 사람은 자발적으로 자기 안에 스스로를 괴롭히는 참소자의 재판장을 두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그것은 교육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이성(理性)이나 지능이 교육의 결과가 아닌 것과 - 설령 교육으로 말미암아 향상되고 계발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주인이 아니며, 도덕법을 따라 살아야할 책임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증언한다.

자신들의 수치를 의식하게 되었을 때, 아담과 하와는 즉시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듦으로써 그것을 가리고자 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는 대신, 그들은 하나님과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것을 감추고자 시도했다.

바로 이것이 자연인(natrual man)이 항상 하는 방식이다. 자연인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타락한 상태를 시인하는 것을 마지막 순간까지 미룬다. 자신에게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의식할 때, 그는 자기 의의 장벽 뒤로 숨으면서 자신의 선한 행실이 악한 행실보다 더 클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의지(依支)한다.

교회에 가는 것, 종교적인 훈련, 각종 규례와 의식(儀式)을 따르는 것, 박해주의와 이타주의 - 이런 것들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영적 수치를 가리는 치마를 만들기 위해 엮는 무화과나무 잎이다. 그러나 우리의 첫 조상들이 엮어 만든 치마와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영원함의 시험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것들은 오래 가지 못한다. 그것들은 곧 말라, 부서져, 가루가 되고 말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서의 한 구절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이 열매를 발견할 수 없었던 또 하나의 무화과나무와 관련한 이야기이다. 두 성경을 비교할 때 그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놀라운 교훈을 배우는가!

어째서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엮은 것이 무화과나무 잎이였음을 듣는가? 또 어째서 우리는 우리 주님이 저주하신 것이 무화과나무 잎이었음을 듣는가? 그것은 우리가 두 성경을 서로 연결시키도록 의도된 것이 아닌가? 무화과나무는 우리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저주하신 유일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이 자신의 영적 수치를 가리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저주 아래 있는 것임을 우리가 배우도록 하기 위함이 아닌가? ♡

그러나 인간의 손으로 만든 치마는 아담과 하와로부터 수치를 의식(意識)하는 것을 없애주지 못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들은 그로부터 피하여 "숨었기" 때문이다(10절). 이와 같이 양심은 사람을 하나님에게로 데려가지 못한다 -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역사(役事)가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

도리어 양심은 사람이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도록 만든다. 우리의 첫 조상들은 이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숨고자 하였다. 여기에서 또 다시 우리는 그들의 행동이 매우 특징적이며 전형적이라는 사실을 주목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과 자신들 사이에 있었던 도덕적인 간격을 최소한 희미하게나마 의식했다. 하나님은 거룩하셨으며, 자신들은 죄를 범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으며, 그로부터 도망치고자 했다. 오늘날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자신들이 오만하게 자랑하는 모든 것들과 종교적인 행위들과 스스로 만든 모든 종류의 치마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불안해 한다. 그들이 성경을 가까이 하는 것을 그토록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이 다른 어떤 책보다도 사람을 하나님께 가까이 데려가기 때문이다.

그럴 때 사람은 두려움과 불편함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피하기를 원한다. 또 사람들이 말씀을 배우는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들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댈 것이다. 그러나 찐짜 이유는 그러한 모임이 하나님을 그들에게 가까이 데려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면서 그로부터 도망치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최초의 죄에 참여하여 아담 안에서 죽었음은 얼마나 명백한 사실인가! 아담은 우리 모두를 대표하여 서 있었다. 그가 인류 전체를 대표하여 행동한 사실은 그의 모든 자손들이 그의 본성을 공유하며, 그의 죄를 영속적으로 반복하는 사실에 의해 온전히 드러난다.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신 것은 아담에게 있어 죄를 고백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11절). 이에 대한 아담의 대답은 무엇이었나? 아담은 이러한 기회를 어떻게 활용했나? 상한 마음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대신, 그는 변명으로 일관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2절). 이것은 하와도 마찬가지였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3절). 그들은 이와 같이 책임을 다른 존재에게 전가함으로써 자신들의 죄를 경감시키고자 했다.

이것은 오늘날 20세기에도 얼마나 놀랍도록 사실인가! 이러한 사실 역시 이것이 신적 영감(靈感)의 산물임을 무심코 드러내지 않는가! 그러나 핑계는 죄책을 더욱 무겁게 만들 뿐이다. 우리는 혼인잔치의 비유 속에서 이러한 원리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화(例話)를 발견한다.

"나는 밭을 샀으매 꼭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눅 14:18 한글개역개정판에는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라고 되어 있음). "꼭" 나가 보아야만 하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이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것을 더 좋아했다. 바로 이것이 그가 "꼭" 나가 보아야만 하는 진짜 이유였다.

이와 같이 그가 내세운 핑계는 결국 그의 죄책을 더 무겁게 만들뿐 이었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17절). 모든 핑계들은 아무 쓸모없었으며, 사람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정죄되었다.

마지막 심판 때도 이와 같을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여기에서 타락의 결과가 네 가지로 나타나는 것을 발견한다.

첫째로, 자신에게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의식하는 것, 둘째로, 자기의 수치를 자기 자신이 만든 덮개로 가리려고 애쓰는 것. 셋째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 앞에서 숨으려고 시도하는 것. 그리고 넷째로,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대신 그에 대해 핑계를 대는 것. 우리는 오늘날에도 이러한 것들이 세상 전체를 덮고 있는 것을 주목할 수 있다. 💕

Arthur W. Pink 창세기강해 p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