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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313] 본문

강해시리즈/산상수훈 강해 (Sermon on the Mount)

[산상수훈 313]

En Hakkore 2024. 8. 4. 11:20

참된 신앙고백 5(마 7:21-27)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좋은 터를 쌓아 두라."

그렇게 하면 당신이 재정적으로 실패하여 역경에 부딪칠 때 당신이 도와준 적이 있는 사람이 당신을 기꺼이 도와주려고 나서게 될 것이다. 또는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을 때라 하더라도 당신의 양심이 당신을 이기적이고 무정했었다고 고발하는 것 때문에 괴로움이 더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죽음의 시각에 이르렀을 때 당신은 자신에게 맡겨진 청지기직을 충실하게 이행하였고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당신을 복되다 일컬어 주리라는 사실을 앎으로써 위안을 얻게 될 것이다.

또한 다가오는 날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에 이르게 될 것이며(요 5:29), 그들이 행한 '선한 일' 로 인하여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자로부터 인정을 받고 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은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즉, 참된 생명을 좀 더 견고하게 의식하며 붙잡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선한 일'은 천국에서 그가 받을 몫을 증명해 주는 큰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랑을 그리스도에게 두며 우리의 참된 계산을 그에게 두고, 지혜로운 상인 같이 행동하자. 즉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과 불확실한 것을 붙잡지 않고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을 그의 영광을 위한 일과 동료를 위한 선한 일에 사용하자.♡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위하여 "하늘에 보물"(마 6:20)을 쌓아 두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미 "영생"의 "계약금" 을 지니고 있다는 확신을 더하여 얻게 될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의 집은 반석 위에 지어진 것이다.

앞의 네 단락을 통하여 우리는 '터'라는 용어를 서로 다른 관계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항상 정확하게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그 말이 들어있는 곳에서는 그것이 어떤 의도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조사해서 각 구절에 맞게 그 취지를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무경험자가 할 일이 아니라 경험이 있는 주석가가 해야 할 일들이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7:24, 25에 해당하는 의미의 범주(즉 중심적인 주제와 의도)는 무엇인가? 이미 설명하였듯이 그것은 신앙고백을 시험하는 것, 즉 그 고백이 진실한 것인지 무가치한 것인지를 밝혀 줄 증거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앤드류 풀러는 적절하게도 이렇게 지적하였다. 즉 이 구절들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에 의해 의롭다 함을 얻을 것이라는 내용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행한 것에 따라 심판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선행이란 의로움 그 자체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자체가 전적으로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거기에서 서술된 사람은 복음을 독선적으로 거부하는 자가 아니라 복음을 들고 그것을 믿는다고 고백은 하면서도 그것에 부합하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것은 천주교도들의 오류를 드러내 주기에 적합한 구절이 아니라 반율법주의자들, 즉 '오로지 믿기만 하여라. 그러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강조해 줄 필요가 있는 구절이다."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구절은 '그러므로' 라는 말로 시작된다. 그 말은 우리 주님께서 지금까지 말씀해 오신 것들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내셨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앞 구절들에서 그는 행동만을 좋아하는 자들, 즉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납해 주신다는 근거로서 그들의 선행과 종교적인 실천만을 믿는 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는 그의 청중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고(13, 14절),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고(15-20절), 헛된 신앙고백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바로 그 앞 절에서는(23절) 자기 자신을 온유하게 죄인들을 구하는 구속자로서 나타내지 아니하시고, 위선자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 고 말씀하심으로써 심판자로 나타나신다.

그런데 이 구절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소개하고 죄인들의 영혼이 안식할 수 있는 구원에 따르는 터를 자기 자신이 이루신 일이라고 갑자기 말씀하신 것이라고 보는 것은 아주 이상하다.

그렇기 때문에 서두의 '그러므로' 라는 말은 전혀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게다가 바로 다음 구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속죄하는 피를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 대신 그의 계율에 복종하는 것이 참으로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Arthur W. Pink 산상수훈 p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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