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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312] 본문
참된 신앙고백 5(마 7:21-27)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구절의 용어에 대하여 고찰하기 전에 우선 우리는 그 범주를 조사하고 결정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것을 하려면 문맥에 대하여 신중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바로 앞 구절들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신앙고백을 분명히 시험한다는 사실, 즉 모든 표면적인 외양 뒤에 가려져 있는 진상을 명백하게 드러나도록 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계속하여 참되고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과, 이름뿐이고 생명이 없는 그리스도인 사이를 구별지어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신다.
어떤 구절들에서는 '집'이나 가정이라는 표현은 사랑이 있고 휴식을 취하는 장소의 상징이지만 여기에서는 폭풍으로부터의 안전지대 내지는 피난처를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떤 집의 안정성과 견고성은 그 집의 기초가 얼마나 튼튼하냐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만일 거기에 어떤 결함이 있다면 그 집을 지은 재료가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 집을 지은 사람들의 기술이 아무리 믿을 만하다 할지라도 폭풍이 닥치면 그 집은 쓰러질 것이다.
모든 주석가들은 이 분명한 사실에 대해서는 잘 파악하였지만 우리 주님께서 사용하신 '반석' 이라는 주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주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문맥을 읽으면 아마도 즉시 이사야 28:16 말씀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즉, 사도행전 4:11과 벧전 2:5-7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그 귀한 '돌'과 '견고한 기촛돌' 이 뜻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기촛돌' 이라는 말을 담고 있는 신약성경의 모든 구절을 이사야 28:16의 말씀으로 되돌아가 그에 비추어 고찰해야 한다거나, 또는 이사야서의 바로 그 말씀과 똑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터는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매[그런데 안다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보호한다는 뜻이다]"(딤후 2:19).
즉 앞 구절과 비교해 볼 때 여기에서의 '터'는 하나님의 명령, 또는 하나님의 약속을 뜻하는 것인데 그 사실은 뒤바뀔 수 없는 것이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셨느니라"(엡 2:20). 여기에서의 '터' 란 사역자의 터, 즉 선포된 진리를 가리킨다.
히브리서 6:1은 "죽은 행실을 회개함에 대한 터" 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곳에 터를 두고 난 후에야 비로소 실제적으로 경건하게 되는데 있어서의 첫출발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뜻을 가진 문맥을 구분해 줄 교사가 필요하다.
이제는 이 문맥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중요한 다른 한 구절이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요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 6:17-19).
사람들은 어찌하여 이 구절을 그리 자주 인용하지 않으며, 좀 더 자주 상세하게 설명하고 강력하게 주장하지 않는 것일까?
그 이유는 그 구절에 대하여 언급할 때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라는 말씀을 수없이 인용함으로써 그 구절의 의미를 약화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그 말씀(딤전 6:17-19)을 그렇게 취급하는 것은 올바른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런데 교회들은 강단에서 행해지는 그런 불충실함 때문에 크게 괴로움을 겪어왔다.
이 구절은 복음의 사역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으로서 사역자의 직분에 있는 자로서 마땅히 수행해야 할 모든 의무들 중의 하나를 상술한 것이다. 그러나 과거 50여 년 동안 그것을 양심적으로 이행해 온 목사가 백 명중에 한 명 꼴이나 될는지 의심스럽다.
수많은 목사들이 교회의 부유한 자들에게 아첨함으로써 그들이 가장 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일은 하지 못하도록 저지한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이 구절은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공로' 를 얻기 위하여, 혹은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기 위하여 자선의 행동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가르쳐 주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사람이 그렇게 말했듯이 우리로 하여금 천국으로 붕 떠올라가게 해주는 황금 먼지구름을 일으켜야 한다"고 가르쳐 주는 것일까? 분명히 그렇지는 않다. 즉 여기에는 천주교도들이 치명적으로 착각하고 있는 교리를 뒷받침해 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우리가 무시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교훈이 들어 있다. 즉 이 세상에서 부한 자들은 바로 그리스도인이므로 다음과 같이 실행해야 할 책임이 있다.
"마음을 높이지 말고"
즉 그들이 가난한 교우들보다 우월하다는 티를 보이지 말고, 신속하게 사라져버릴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며", 변하지 아니하시므로 우리의 참된 재산이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한다.♡
그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이 주사 누리게 하셨으나" 함부로 낭비하도록 주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것으로 "선한 일을 행하라"고 하셨으니 그들의 청지기직을 충실하게 이행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양심, 즉 그들이 소망을 두기에 믿을 만한 기반이요. 그들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는데 있어서 견고한 기초인 그들의 양심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두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Arthur W. Pink 산상수훈 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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