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Hebrews 167] 본문

강해시리즈/히브리서 강해 (An Exposition of Hebrews)

[Hebrews 167]

En Hakkore 2024. 6. 9. 11:03

믿음의 권속 3(히 11:39-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원한 뜻, 영원한 언약을 바라보며 쓰여진 말이다. 그 말은 하나님의 결심, 그리스도께서 속죄, 화목제물이 되실 약속과 결심을 지시하는 말이다. 또한 그가 강림할 정확한 시기를 지시한다.

"때가 차매(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정하신 때),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갈 4:4). 이 문장에서 주어진 약속과 "실행된" 약속 사이의 대조가 지시되어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그 요점을 통해서 우리는 구약 성도등의 믿음과 신약 성도들의 믿음의 본질적인 차이를 발견한다.

구약 성도들은 오셔야 할 구세주를 내다 보았고, 신약의 성도들은 이미 오신 구세주를 뒤돌아본다. 이처럼 명백하고 단순한 것을 많은 사람들이 모호하고 난해하게 생각한다는 것이 정말 이상해 보인다.

벌링거(E. W. Bullinger)는 그의 '구름 같은 증인들' 이라는 책에서 이 대목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시작했다. "이 귀절들은 베드로 사도가 바울의 서신을 언급하면서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 있다'고 말했는데 바로 그러한 것들에 속하는 구절들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 구절들은 적지 아니한 난제를 제시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알기 어려운" 것이 무엇인가? 이 구절이 쓰여진 바로 이 히브리서에서 정확한 해석을 할 수 있는 확실한 열쇠를 제공한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히브리서의 대 주제는, 기독교가 유대교보다 말로 할 수 없이 탁월하다는 것이다.

이 강해서를 읽어온 독자들이라면 이에 대한 예증이 우리 앞에 얼마나 많이 나왔던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11:39,40에 또 다른 예증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저희가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그러나 우리는 그 약속 성취를 받았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 7:19,22 ; 8:6 ; 9:23 ; 10:34을 참조하여 "더 좋은 것"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라.

이 본문 말씀을 거의 모든 현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이용하고 있는가를 알면 정말 애처롭고 통탄할 일이다. 모세의 경륜과 그리스도의 경륜 사이를 대조하려고 애를 쓰면서, 구약성경의 많은 내용들을 모르고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이라는 말에 사로잡혀 그만 그들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 가운데 하나를 범하고 만다.

그렇게 해서 시편이나 선지자들을 피상적으로나마 알고 있는 사람들조차 도저히 옹호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는 데 하등의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을 그 본문을 읽어서 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진 것, "더 좋은 것"은 영생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중생이나 성령의 내재하심이라고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늘의 소명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는 것을 뜻한다고 주장한다. -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이 복락을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도 누리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오늘날 이 타락한 세대 속에서 구전으로나 아니면 문서로 된 사역의 대부분 속에서 바로 그러한 쓸데없는 표본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들을 "세대주의자"들로 부르는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구분한다는 주제넘고 과격한 시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가족들을 그릇되게 나눠버린다. 은혜로 선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아버지로,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구주로, 성령을 자기들의 위로자로 삼는다.

세상 역사가 시작되고부터 끝까지 구원받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받는 대상들이고, 그리스도의 속죄 은전을 같이 누리며, 성령으로 낳아서 같은 기업을 물려받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셨던 때와 똑같은 믿음을 아벨에게 주셨다.

아브라함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의롭다 함을 받는 방식과 동등하게 의롭다 함을 받았다(롬 4장). "모세는 그리스도의 능욕"을 짊어지고 우리 앞에 있는 "상급"을 우리와 동일하게 바라보았던 것이다(히 11:26).

다윗도 우리와 똑같이 지상에 있을 때에 나그네와 행인처럼 살았다(시 119:9). 그리고 우리처럼 하나님의 우편에 있는 동일한 영원한 즐거움을 바라다 보았다(시 16:11; 23:6).

"세대주의자들"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다음과 같은 요점들의 실태에서 자라난 것이다. 모세의 경륜과 그리스도의 경륜을 유기적으로 연합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영원한 언약"의 복락을 나눠주는 행정에 있어서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또한 신령하게 남은 자들과 민족 자체를 구분하지 못했다. 족장의 세대와 모세의 세대와 이 기독교 세대 사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진술할 수 있다. 그들은 각자 스스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부분적으로 처음과 나중의 관계요, 껍질과 알맹이의 관계이다.

족장 시대와 모세 세대는 준비적인 단계였고, 이 그리스도인의 세대는 온전히 발전된 단계였던 것이다 - 처음에는(족장시대에는) 이삭이 나기 전에 잎사귀만 난 상태이고, 모세 시대에는 이삭이 핀 상태이고 그리스도인의 시대에는 그 이삭이 온전히 영근 상태이다.

전자를 통해서 우리는 그림자와 모형을 보며 후자를 통해서 그 원형과 실체를 본다. 기독교는 이전시대에 존재했던 것의 완전한 완성이거나, 아니면 이전시대에 계시되었던 진리와 원리들을 더 장엄하게 실증시킨 것이다.

Arthur W. Pink 히브리서 강해 II p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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