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Hebrews 164] 본문

강해시리즈/히브리서 강해 (An Exposition of Hebrews)

[Hebrews 164]

En Hakkore 2024. 6. 9. 10:59

믿음의 정점 II-④(히 11:37-38)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여기에서도 이중적인 것을 의미할 것이다. 첫째로, 폭력의 칼이다. 흉포는 핍박자들이 하나님의 종들과 백성들이 가진 충성스러운 믿음을 이유로 그들을 칼로 죽였던 것이다(삼상 22:18, 21 왕상 19:10). 둘째로, 공의의 칼이다. 아니면 불공정의 칼인 것이다.

성도들에게 법을 적용하여 그러한 고통을 주었던 경우를 가리킬 것이다. 아마 이러한 형태의 죽음이 마지막으로 언급된 것은 진리로 인친 순교자들의 "수많은 무리"를 의미있게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문자적으로 우리가 다룰 본문을 번역한다면 "그들이 칼에 도살당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점은 개걸스럽게 피에 주린 핍박자들의 마음의 상태와, 그들이 죽인 대단히 많은 성도들의 수를 지시하는 것이다. 교황주의자들은 이 점에 있어서 이교도들을 능가한다. 프랑스와 다른 곳에서 그들의 잔인한 대량 학살이 있었던 것이다.

성령께서는 음란한 바벨론을 "성도들의 피에 취한" 자들로 나타내시기를 잘하신 것이다(계 17:6).♥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이 말은 그들이 자기 가정에서 쫓겨나 정해진 거처없이 추방당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들은 짐승과 함께 하도록 내쫓김을 당했고, 사람이 지은 옷이 아니라 짐승의 가죽 옷을 입고 살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이러한 형태의 고난이 언급되는 이유는 한편으로 종교적인 핍박의 잔인성을 보여주고, 또 한편으로는 믿음의 강력한 집행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 힘은 얼마나 놀라운가! 그것은 사회 법을 어긴 무법자에게 행해지는 것 같은 그러한 강제 이상의 것이었다. 오히려 모세의 형태와 같이 의도적인 선택이다(24-26).

이렇게 집을 떠나 방황하는 그 사람들은 어느 때든지 원하기만 한다면 자기들의 동료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의 사회에서 함께 위안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배도하는 대신 그것을 더 원했던 것이다"(E. W. B.).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 어휘들은 가정을 잃어버린 성도들의 당하는 여러 가지 고통과 그 고통의 강도를 나타낸다. "궁핍"은 생활에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박탈당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친척이나 친구들의 도움을 거절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어떤 생활대책 없이 쫓겨났고, 그들을 돌보는 모든 사람들의 원조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환란"은 그의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 그들은 감정이 없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저희들의 서글픈 조건을 예리하게 느꼈다. 의심할 여지없이 원수는 그들의 상태를 이용하여 그들의 마음 속에 많은 불신앙적이고 과격한 생각을 주입시켰을 것이다.

"학대를 받았으니"라는 말은 여기에서 오히려 더 강한 말이다. 이는 그들이 유리하면서 맞는 비우호적인 외인들로부터 당했던 악한 대접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 외인들은 그들을 전혀 불쌍히 여기지도 않고 악하게 대접했던 것이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의 괄호 안에 들어 있는 말씀은 반론을 막을 목적으로 여기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멸시받는 유리자들은 마땅히 받을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살기에 합당치 못한 사람들로 말이다.

그러한 잘못된 생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사도는 마땅히 받아야 할 책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그 사회는 하나님의 성도들로 말이다. 아울러 그 사회는 하나님의 성도들을 그 중에 받아둘 만한 가치가 없는 곳임을 확증하고 있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여기서 "세상"은 불경건한 사람의 전체 집단을 가르키는 것이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문맥의 의미에서) 배도적인 "세상을" 가리킨다. 교회 역사나 모든 일반적인 세상 역사는 바로 이 점을 조화적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을 가장 악독하고 비양심적으로 잔인하게 핍박했던 사람들은 "종교적인"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의 자녀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평가와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들의 평가가 어떻게 차이나는가를 본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기뻐하시는 그들을 "땅의 존귀한 자"들로 여기신다(시 16:3).

"참된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 안에 거룩케 하시는 성령의 내재함을 갖고 있으므로 백만의 세상 사람들보다 더 존귀하다. 마치 값지고 보배로운 보석 하나가 수많은 진흑더미보다 더 가치있듯이 말이다"(W. Gouge).♥

성도들의 탁월함은 그들의 거하는 곳에서 그들이 끼친 유익과 복락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그들은 "세상에서 금"이다. 물론 그들로서 하나님의 심판의 손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창 19:22). 또한 축복을 가져온다(창 30:27).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치유를 얻어낸다(창 20:17).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악하게 대접하는 사람들보다 많은 빚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얼마나 깨닫지 못하는가?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그들은 정해진 거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거친 들로 쫓겨나 짐승들이 사는 굴 속에 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을 대적하는 원수들의 흉포함을 피하기 위해서 말이다. 여기서 "유리하다"는 말은 앞절에서 사용된 말과 다르다.

앞절에서는 이집 저 집으로, 이 마을 저 마을로 도움을 바라고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서는 그러한 것들이 전혀 약속되어 있지 않다. 여기에서 말하는 유리함은 알지 못하는 땅에서 유리함을 의미한다. 그들은 어디로 갈지 알지 못했다(눈먼 사람처럼).

히브리서 11:8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할 때 이 용어가 사용되었고 창세기 21:2에서 하갈의 경우에도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 마태복음 18:12에서도 유리하는 양이 나오는데 그것을 묘사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 본성에 대해서 얼마나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인가.

이 하나님의 성도들은 마귀의 입김으로 쓰임을 받는 종교적인 세계에서보다 들판에서 짐승들 틈에 있는 것이 더 안전했다. 이러한 구절이 읽혀지고 있는 지금도 어디에선가 낯선 나라에서 이와같은 시험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을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이 이런 여러 가지 시련을 당하는 영혼을 지탱해 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진리에 우리의 마음의 뿌리를 내리고 든든히 서기 위해서 주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우리가 얼마나 수고하는 것이 필요한가. 그래야만 환란과 핍박이 올 때에 이러한 신령한 은혜의 능력과 열매들을 낼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 뿐만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도 극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할 일 속에 어떠한 고난을 주신다 할지라도,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그 분을 보는 것처럼 참고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원수들이 그 증오감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극악하고 무서운 형태로 죽음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할지라도, 성도들의 믿음은 담대히 그것을 맞아 참아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제어하시는 손이 여전히 하나님을 떠나 불신앙에 빠져 있는 사람들 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인하여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Arthur W. Pink 히브리서 강해 II p581

♪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한 복된 한가위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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