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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 (The Sovereignty of GOD)

[하나님의 주권 71]

En Hakkore 2024. 5. 23. 16:06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우리의 태도

4. 깊이 감사하며 기뻐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우리는 성부에 대한 성자의 절대 복종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하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둘 사이에 완전한 조화가 있었다는 것뿐이다. 주님은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38)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길을 성경이 제시하는 그대로 주의 깊게 따르는 자는 누구든지 그분이 이 주장을 완전히 실증하셨다는 것을 안다.

겟세마네를 기억하라! 아버지께서 쓴 잔을 아들에게 내미신다. 예수님의 태도를 주의 깊게 생각해 보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에게서 배워라. 기억하라.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육신이 되신 말씀, 완전히 인간이신 분을 본다.

그분의 몸을 이루는 모든 성경이 그분을 기다리는 육체적 고통을 예상하며 떨고 있다. 그분의 거룩하고 섬세한 본성이 그분이 받을 무서운 멸시에 움츠리고 있다. 그분의 마음이 그분 앞에 놓인 무서운 '치욕'에 찢어지고 있다.

그분의 영혼이 어둠이 세력과의 무서운 싸움을 내다보며 크게 괴로워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분의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다는 생각이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그분은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쏟아내고, 크게 부르짓고 눈물을 흘리시며, 말하자면, 굵은 핏방울을 흘리신다.

잘 보고 잘 들어라! 숨을 죽이고 그분의 복된 입술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어라.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여기 체현(體現)된 복종이 있다. 여기 주권적인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 복종을 보여주는 최고의 본보기가 있다. 그분은 우리가 따라야 할 본보기를 남기셨다.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셨고, 모든 부분에서 우리처럼 시험(유혹)을 받으셨으나 죄는 없으셨다. 이렇게 그분은 자신이 우리 피조물의 본성을 어떻게 입으셨는지 보여주셨다.

앞에서 우리는 이렇게 물었다. 우리는 아버지의 뜻에 대한 그리스도의 절대 복종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하는가? 우리의 대답을 조금 더 확대해 보자. 모든 곳에서처럼 여기서도, 그분은 유일무이하며 비길 데 없었다. 그분은 모든 부분에서 충만하셨다. 주 예수께는 깨져야 할 거역하는 의지가 없었다. 그분의 마음에는 복종시켜야 할 게 전혀 없었다.

이것이 그분이, 예언 가운데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시 22:6)고 말씀하신 한 가지 이유가 아니었는가? 벌레는 저항할 힘이 없다. 그분 속에는 저항이라는 게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분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그분은 모든 면에서 아버지와 완전히 조화를 이루셨기 때문에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여기서 마지막 부분에 주목하고, 그분의 비할 데 없는 뛰어남을 보라.

하나님은 자신의 법을 우리의 생각에 두시고 우리의 마음에 새기셔야 한다(히 8:10). 그러나 그분의 법은 이미 그리스도의 마음에 있었다. 그리스도의 감사와 기쁨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예가 마태복음 11장에 나온다.

첫째, 침(세)례 요한이 믿음에서 실패하는 장면이 나온다(2-3절). 둘째, 사람들이 불평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전하는 기쁨의 메시지에도 만족하지 못했으며 요한의 엄중한 메시지에도 만족하지 못했다(16-20절). 셋째, 은혜를 입었으며, 주님이 이적을 행하신 성읍들이 회개하지 않는 모습이 나온다(21-24절).

그런 다음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25절).

평행구절인 누가복음 10장 21절은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감사하나이다"로 시작한다는 데 주목하라. 여기 가장 순수한 형태의 복종이 있다. 여기 세상을 창조하셨으나 낮아지고 배척을 당할 때 기뻐하고 감사하며 '천지의 주재'의 뜻에 복종하신 분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5. 경배하며 예배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런 말이 있다. "진정한 예배는 인식된 위대함에 기초하며, 위대함은 주권에서 비할 데 없이 드러나며, 다른 그 무엇도 인간이 드리는 진정한 예배의 기초가 되지 못한다"(J. B. Moody). 맞는 말이다. 보좌에 앉으신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스랍들마저도 자기의 얼굴을 가렸다.

하나님의 주권은 폭군의 독재자의 주권이 아니라 무한히 지혜롭고 선하신 분이 행하시는 뜻이다. 하나님은 무한히 지혜롭기 때문에 오류를 범하지 않으신다. 이 진리의 가치가 여기 있다.

하나님의 뜻이 불가항력적이며 되물을 수 없다는 사실 자체는 나를 두려움에 잠기게 한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이 선한 것만 뜻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내 마음은 기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이 질문의 마지막 답이 여기 있다.

우리가 취해야 할 바른 태도는 경건한 두려움, 절대 복종, 완전한 내어맡김과 복종의 태도이다. 그러나 이뿐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식과 그 주권자가 나의 아버지라는 깨달음이 내 마음을 압도하며, 그로 인해 내가 그분 앞에 엎드려 그분을 경배하고 예배해야 한다.

나는 언제나 이렇게 말해야 한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26).

우리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예를 하나 들며 마무리하겠다. 약 200년 전에 고결한 마담 귀용(Madam Guyon, 1648-1717)은 끼니때만 촛불을 켜주는 지하 감옥에서 10년을 보낸 후 이런 그을 썼다.

나는 한 마리 작은 새
드넓은 창공을 날 수는 없네.
그러나 나 새장에 앉아 노래하네
나를 이곳에 두신 분께.
나는 아주 기뻐하는 죄수라네
내가 여기 있는 것이
나의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때문이네.
달리 할 일이 없기에
나는 온 종일 노래하네.
내가 당장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분께서
내 노래를 들으시네.
그분은 나의 퍼덕이는 날개를 묶어두셨으나
여전히 몸 구푸려 내 노래를 들으시네.
나 새장에 갇혔기에
멀리 날아가지 못하네.
비록 날개는 묶였으나
내 마음 자유로우며,
감옥의 벽도 막지 못하네
내 영혼의 비상과 자유를.
아, 이 빗장과 창살을 벗어나
내가 경외하는 그분을 향해
내가 사랑하는 섭리를 행하시는 분을 향해
솟구치는 것이 참으로 좋네.
당신의 전능한 뜻 안에서 나 찾았네
마음의 기쁨과 자유를.

Arthur W. Pink 하나님의 주권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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