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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 (The Sovereignty of GOD)

[하나님의 주권 73]

En Hakkore 2024. 5. 23. 16:08

난제와 반론 2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주어졌다. 그러므로 인간의 언어로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적인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지적인 수준으로 내려와 우리가 이해하는 방법으로 우리와 소통하신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 12:4)라고 말한다. 땅 위의 인간은 하늘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유한한 존재는 무한한 존재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전능자께서 자신의 생각을 우리가 이해하는 용어로 표현하신다. 이런 까닭에 성경에는 신인동형론(anthropomophism), 즉 하나님을 인간의 형태로 표현한 부분이 아주 많다. 하나님은 영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에게 눈과 귀와 코와 호흡과 손 등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이 이해하는 수준으로 낮춰서 표현된 용어들이다.

또한 창세기 18장 20~21절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이것은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소돔에 만연한 상황을 아셨으며, 그분의 눈은 소돔의 무서운 죄를 보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서 인간의 어휘를 빌려 사용하신다.

그리고 창세기 22장 12절은 이렇게 말한다. "사자가[하나님이]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테스트하기 전에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 정확히 아셨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신다. 아주 빈번하게 인용되는 하나님이 '일찍부터 일어나셨다'(렘 7:13, "새벽부터 부지런히"-한글개혁성경)라는 예레미야의 표현도 차용된 용어가 분명하다.

하나 더 있다. 포도원의 비유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포도원 주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하신다.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눅 20:13).

그러나 하나님이 포도원 일꾼이 자신의 '아들을 존대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의 말씀이 선포했듯이 그 아들을 멸시하고 거부하리라는 것을 완벽히 잘 알고 계셨던 게 확실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창세기 6장 6절의 "[하나님이]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라는 말씀도 인간의 이해를 위해 용어의 수준을 맞춘 것이라고 이해한다. 이 구절은 하나님이 미리 알지 못했던 사건을 만났고 그래서 인간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구절은 거룩한 하나님이 인간이 빠진 무서운 죄악과 부패를 싫어하신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우리 해석이 적법하고 논리적으로 옳다는 데 조금이라도 의심이 남는다면, 성경을 직접 찾아보면 즉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삼상 15:29).♡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하나님이 인간의 표현 방식을 자신에게 적용하신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으면, 모호하고 당혹스러운 구절들이 있다. 우리가 여기서 말한 내용은 바로 이러한 구절들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창세기 6장 6절에 대해 설명했음으로, 같은 부류에 속하는 다른 구절들을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다른 몇몇 구절을 살펴보기 원하는 독자들을 위해, 한두 구절만 더 보겠다.

이 책이 제시하는 가르침을 뒤집으려고 자주 인용되는 구절은 주님이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시는 장면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여기서 흔히 제기되는 물음이 있다. "이 말씀은 구주께서 유대인들이 자신의 은혜로운 접근을 모두 거부했기 때문에 자신의 사명이 실패했음을 인정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가?"

이 물음에 답하면서, 먼저 지적해야 할 사실이 있다. 주님은 지금 자신의 사명을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은혜를 시대마다 거부한 유대인들을 꾸짖고 계신다는 것이다. 주님이 선지자들을 언급하신다는 사실로 볼 때, 이것은 분명하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얼마나 큰 은혜와 인내로 대하셨는지 보여주며, 그분의 백성이 처음부터 끝까지 참으로 완악하여 하나님께로 모이길 거부했는지 보여준다. 우리가 알듯이, 하나님은 마침내 이들을 버려두어 이들이 임의대로 행하게 하셨다. 그러나 동일한 성경이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이 미리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사악함 때문에 좌절되지는 않는다고 선언한다(왕상 8:33 참조).

마태복음 23장 37절을 이사야 65장 2절과 비교해도 좋을 것이다. 이사야 65장 2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의 영원한 목적에 어긋나는 일을 하려 하셨는가?

칼빈의 말을 빌려 대답하겠다.

"우리가 이해하기에, 하나님의 뜻은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서로 모순된 일을 하지 않으신다. 바울의 표현에 따르면, 하나님이 지금은 그분의 뜻에 반대되는 듯이 보이는 일을 신비롭게 의지하신다(wills, 하려 하신다)는 것을 이해할 능력을 받을 때까지, 우리의 이해력으로 다양한 면을 지닌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빈번하다."

Arthur W. Pink 하나님의 주권 p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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