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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칠언 3] 용서의 말씀 1 본문

가상 칠언, 그 의미와 적용

[가상칠언 3] 용서의 말씀 1

En Hakkore 2024. 5. 13. 11:34

용서의 말씀(the Word of Forgiveness)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누가복음 23:34)

인간은 최악의 일을 저질렀다. 세상을 만드신 분이 세상에 왔지만 세상은 그를 알지 못했다. 영광의 주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육체로 잠시 사셨지만 사람들은 그를 원하지 않았다. 죄에 눈이 먼 그에게서 당연히 갈망해야 할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여관에는 방이 없었다. 이것은 그가 사람들의 손에서 받게 될 대접의 전조가 되었다. 그가 태어나자마자 헤롯은 그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다. 이것은 그의 백성들이 적개심에 불타오르는 것을 암시하며 사람들의 증오가 극에 치달아 십자가에 이르는 것을 미리 보여 주었다.

계속해서 그의 적들은 그를 파괴하려고 시도했다. 이제 그들의 사악한 욕망은 기회를 얻는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었다. 모함으로 시작된 재판이 열렸고, 재판관들은 그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을 수 없었지만 어찌 되었든 그를 증오하는 무리들이 끈질기게 아우성을 치며,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댈 때 굴복해 버렸다.

인간은 잔인한 일을 저질렀다. 평범한 죽음으로는 굶주린 그의 적들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지독한 고통과 수치의 죽음이 선고되었다. 십자가가 세워지고 그 십자가에 구주가 못 박혔다. 거기에 그가 매달려 있다. 말없이.

그러나 이제 그의 창백한 입술이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동정을 호소하고 있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란 말인가?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에게 저주라도 퍼붓고 있는가? 아니다. 그는 기도하고 있다. 자신의 적들을 위해 기도한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마디 말씀 중에 첫 번째는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 준다. 참으로 깊은 의미와 심오한 가르침이 담겨 있다! 그는 공생애를 기도로 시작하셨고(눅 3:21), 여기에서 보듯이 기도로 마무리 하셨다. 확실히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셨다!

병사들을 위해 더 이상 손을 내미실 수 없을 것이다. 두 손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기 때문이다. 자비를 베푸시기 위해 더 이상 다니실 수 없을 것이다. 두 발이 잔인한 나무에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제자들을 더 이상 가르치실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주를 버리고 도망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주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바로 기도 사역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다!

나이가 들고 병이 들어서 더 이상 주님의 포도원에서 활발히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는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선생이나 설교자, 주일학교 교사, 전도지를 나누어 주던 봉사자였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침대에 누워 지낼 뿐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 땅에 살고 싶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기도 사역을 시키려고 이곳에 살 수 있는 며칠을 더 주신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에 왕성했던 봉사 활동보다 기도 사역을 통해 더 많은 것을 이룰 수도 있다.♡

만약 그런 사역을 얕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당신의 구주를 기억하라. 그는 기도하셨다. 남을 위해 기도하셨고,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마지막 순간에도 기도하셨다.

적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잘못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완벽한 모범을 보여 주셨을 뿐 아니라 그 어느 누구도 기도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살인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면 우리도 용기를 내어 극악한 죄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 책을 읽는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소망을 잃지 말라. 그 남자, 그 여자, 제멋대로인 자녀를 위해 계속 기도하는 것이 시간 낭비로 여겨지는가? 그들의 상황이 매일 더 절망적으로 변해가는가? 그들은 마치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

당신이 오랫동안 기도해 온 사람이 유행하는 이단에게 잡혀 있거나 공공연하게 하나님을 부인하는, 한 마디로 말해, 노골적인 그리스도의 적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기억하라. 그리스도는 자신의 적을 위해 기도하셨다. 그 누구도 기도의 대상에서 제외시키지 않는 법을 배우라.♡

이 기도에서 생각해 볼 것이 하나 있다. 바로 기도의 능력이다. 적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중보기도는 놀랍고 분명한 응답을 받았다. 오순절 날 삼천 명의 회심이 그 응답이다. 이 같은 결론은 사도 베드로가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 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고 말한 사도행전 3장 17절을 근거로 내린 것이다.

베드로가 사용한 "알지 못하여서"라는 말이 주님이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일치하고있다. 이것이 단 한번의 설교로 삼천 명이 회심한 사건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설명한 것이다. 그 도화선이 된 것은 베드로의 유창한 설교가 아니라 구주의 기도였다.

믿는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분을 믿기 훨씬 전에 당신과 나를 위해 기도하셨다. 요한복음 17장 20절에 그 증거가 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을 위함이 아니요, 또 저의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요 17:20).

여기에 완벽한 모범이 주시는 교훈이 또 있다. 우리도 하나님의 적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해야 한다. 믿음으로 기도하면 잃어버린 죄인들을 구원하는 능력 있는 기도를 하게 될 것이다.

이제 본문을 살펴 보자: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1.예언된 말씀이 성취되었다.

하나님은 바로 그날에 일어날 일들을 미리 많이 알려 주셨다. 성령님은 주님의 수난을 모든 주변 상황들까지도 함께 완벽한 그림으로 보여 주셨다. 그 중에 구주가 "범죄자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예언(사 53:12)이 있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서 하시는 현재의 사역을 언급한 게 아니었다.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는 말씀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믿는 자들을 위해 지금 주께서 하고 계시는 기도를 말하는 반면, 이사야 53장 12절은 십자가에 달리신 때에 주께서 행하신 은혜로운 행위를 언급한 것이다. 죄를 범한 자들을 위한 주님의 중보기도하시는 것이 이렇게 연결되는 것을 주목하라.

"이는 그가 ...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그리스도께서 적을 위해 중보기도하시는 것은 이사야 53장에 있는 놀라운 예언 중 하나였다. 이 장은 구속자의 굴욕과 수난에 대해 적어도 열 가지는 말하고 있다.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된다. 간고를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다. 상하고 찔리고 채찍에 맞는다. 순순히 도수장으로 끌려간다.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하다. 사람의 손에 고난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도 상처받는다. 영혼을 죽음에서 내어 준다. 부자의 무덤에 묻힌다. 그리고 덧붙여서, 범죄자와 같이 헤아려지고, 마지막으로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한다.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는 예언은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로 성취되었다. 그는 자신의 살인자들을 생각하셨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위해 간구하셨다. 그들의 죄 사함을 위해 기도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Arthur W. Pink 가상칠언 그 의미와 묵상 p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