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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칠언 6] 용서의 말씀 4 본문

가상 칠언, 그 의미와 적용

[가상칠언 6] 용서의 말씀 4

En Hakkore 2024. 5. 13. 11:36

6. 사람에게는 크고 우선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 있다

모든 사람이 첫 번째로 꼭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죄인이며, 죄인이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숭고한 이상을 선택하고, 훌륭한 결단을 내리며, 탁월한 삶의 기준을 받아들이는 것들이 다 헛되다.♡

고상한 품성을 개발하려고 노력하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만한 일들을 하려고 작정하여도, 하나님과 우리 영혼 사이에 죄가 있는 동안에는 그 모든 것이 다 쓸모없다. 발이 마비되었는데 신발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눈이 보이지 않는데 안경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죄 사함의 문제는 기본적이고 근본적이며 극히 중대한 것이다. 아직 죄 가운데 있다면 수많은 동료들의 존경을 바라보아야 별 거 아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라면 아무리 일에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다고 해도 아무 것도 아니다. 죽는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 있는가이다.

두 번째로 꼭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은 죄 사함을 얻는 방법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는 근거가 무엇인가? 여기에서 하나님의 죄 사함과 대부분의 인간의 용서가 확실히 디르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게 중요하다.

대체적으로 인간의 용서는 관대함. 흔히 느슨함의 문제이다. 용서는 정의와 의로움을 희생할 때 나타난다. 세상의 법정에서 재판장은 두 가지 대안 중에서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 피고가 유죄일 경우, 재판관은 법대로 형을 집행하든가 아니면 법의 명령을 묵살해야 한다.

전자는 정의이고 후자는 자비이다. 재판관이 법대로 집행하면서 자비도 보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제 3의 인물이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의 형을 대신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정의를 저버리면서 자비를 베풀지는 않으신다.

온 세상의 재판관이신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신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하나님의 진노의 법을 온전히 만족시키는 한 분을 통해서이다. 하나님 자신의 아들이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대신하여 나무 위에서 자신의 몸으로 사람들의 죄를 지심으로써 가능하다.♡

하나님은 정의로우시면서도 자비로우셨고, 자비로우시면서도 정의로우실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은혜가 공의로 말미암아 다스린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믿는 모든 자들을 의롭게 하시는 의가 예비되어 있다. 성경은 말한다.

"또 이르시되 '이 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46-47).

또한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

구주께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외치신 것은 그가 흘리신 피 때문이었다. "피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도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주께서 드린 속제의 희생 때문이었다.♡

그리스도는 적들의 죄 사함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바로 그들에게 꼭 필요한 것을 직접 지적하셨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담의 모든 후손들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는가? 죄 사함을 받았는가? 은혜로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4)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7. 구속하는 사랑이 승리했다

본문 누가복음 23장 34절에서 첫 번째 단어, "이에"를 주목해 보자. 바로 앞 구절은 이렇다.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눅 23:33).

이에,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희들을 용서하옵소서" 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 인간의 사악한 마음이 무모한 장난에서 드러났을 때, "이에" - 창조물들이 더러운 손으로 감히 영광의 주님을 못박았을 때, 주님은 그들에게 가공할 만한 저주를 퍼부을 수도 있으셨다.

의의 진노를 발하셔서 그들을 칠 수도 있으셨다. 땅을 열어 지옥 구덩이 속에 산 채로 보낼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그러지 않으셨다, 말할 수 없는 수치를 당하시고, 뼈아픈 고통을 겪으시며, 멸시를 받으시고, 배척을 당하시며, 미움을 받으셨지만, 주님은 외치셨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바로 구속하는 사랑의 승리였다. 사랑은 "오래 참고...온유하며...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 7). 이 사랑이 십자가에서 나타났다.

삼손은 마지막 시간이 다가왔을 때, 적들을 완전히 파괴하는 데 자신의 괴력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완전하신 주는 적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함으로써 사랑의 힘을 나타내셨다. 참으로 비길 데 없는 은혜이다!

스데반조차도 구주께서 세우신 복된 모범을 온전히 따르지는 못했기에 "비길 데가 없다." 사도행전 7장을 보면 그는 먼저 자신을 생각하고 나서 적들을 위해 기도했다-"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로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59-60).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순서가 뒤바뀌었다: 먼저 적들을 위해 기도하신 후, 마지막에 자신을 위해 기도하셨다. 모든 것에서 그는 뛰어나시다.

이제 적용과 권면의 결론으로 들어가 보자. 만약 믿지 않는 사람이 이 용서의 장을 읽었다면, 우리는 진심으로 그에게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고 권할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를 알면서도 대항하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이다!

구주를 못 박은 사람들은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당신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 바로 사실이고 중대한 일이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인생의 주인으로 왕좌를 드리며, 그를 기쁘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이 처음이고 마지막 관심사이어야 한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다.

그러므로 당신의 위험이 극히 크다는 것을 말해 주고 싶다. 고의적으로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은 죄에서 구원할 유일한 분을 거절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 10:26-27).

하나님의 죄 사하심을 복되게 완성하는 데 우리는 한 마디 말만 덧붙이면 된다.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힘들어 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 전에 지은 죄는 모두 용서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종종 중생한 이후에 지은 죄에 관해서는 확신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범죄해서 하나님이 베푸신 죄 사함이 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피가 과거의 죄만 해결하고, 현재와 미래의 죄는 자신들이 알아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내게서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죄 사함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천국에 가는 것이 내가 그리스도께 매달리는 것이나 나의 순종과 믿음에 달려 있다면 온전한 평화란 분명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죄 사함은 모든 죄-과거, 현재, 미래-를 다 포함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으로 믿는 우리들의 "죄"를 지지 않으셨는가? 주께서 돌아가셨을 때 당신의 모든 죄는 미래의 죄가 아니었는가?

분명히 그 때 당신은 태어나지도 않았고 죄는 하나도 짓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당신의 과거의 죄만큼이나 진실로 "미래"의 죄도 지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지 않은 영혼이 용서받지 못하는 자리에서 용서받는 자리로 옮겨진다고 가르친다: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않은 사람은 복이 있도다!"(롬 4:8).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거기서는 죄가 다시 우리에게 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자리이며 위치이다. 그리스도 안이 그가 우리를 붙드시는 곳이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온전히 그리고 영원히 죄 사함을 받았다. 이 땅에서 백 년을 머문다 해도 나의 구원을 건드릴 만큼 죄가 나의 책임을 추궁할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나는 영원히 죄의 자리에서 벗어났다.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골 2:13), 여기에서 둘이 하나가 되었음을 주목하라.(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

내가 부활하신 주와 연합한 것이 나의 죄 사함과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면 내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3). 나는 영원히 죄의 책임을 져야 하는 곳에서 벗어났다. 성경은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면 어떻게 정죄함이 있을 수 있을까?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는 어떤 죄의 책임도 물을 자가 없다(롬 8:33). 믿는 자들은 영원히 모든 것을 사함받았으므로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자."♡

Arthur W. Pink 가상칠언 그 의미와 묵상 p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