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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칠언 8] 구원의 말씀 2 본문

가상 칠언, 그 의미와 적용

[가상칠언 8] 구원의 말씀 2

En Hakkore 2024. 5. 13. 11:37

구원의 말씀(The Word of Salvation)

죽어가는 강도의 구원에서 우리는 성경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승리의 은혜를 명확히 직시한다. 하나님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시며,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구원을 얻었나니"(엡 2:8).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로 말미암는다." 은혜는 구원을 계획하고, 은혜는 구원을 제공하며, 은혜는 선택된 자들에게 또한 그들 안에서 활발히 활동하여 굳어진 마음과 집요한 의지와 증오가 끊어오르는 생각을 극복하고 구원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우리의 구원은 은혜가 시작하고, 은혜가 지속하며, 은혜가 정점을 이룬다.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 - 주권적이고 불가항력적이며 값없이 주시는 은혜 -은 신약에서 가르침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로 설명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건이 아마도 다소 사람 사울과 죽어가는 강도의 구원일 것이다.

그리고 강도의 경우가 바울보다 훨씬 더 눈길을 끈다. 나중에 이방인을 위한 사도 바울이 된 사울은 처음부터 도덕적으로 모범이 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회심하고 수 년이 지난 후에, 회심하기 전의 상황에 대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 3:6)였다고 서신에서 밝히고 있었다.

그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다. 행동은 격식에 맞았고 태도는 단정했다. 도덕적으로 그의 인품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회심한 이후에, 그의 삶은 복음의 의 그 자체였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매인 자가 되어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을 세우려고 애쓰면서 일생을 온전히 희생하였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상에 가장 근접했고,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그 어느 성도보다 뛰어났다고 말해도 분명히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강도는 정반대였다. 회심 전에 도덕적인 삶도, 회심 후에 적극적인 섬김의 삶도 없었다.

회심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율법이나 사람의 법이나 다 무시했다. 회심한 이후에는 그리스도를 섬길 기회도 갖기 전에 죽어버렸다. 나는 이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가 우리의 구원에 기여하는 원인이라고 많이들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받아 주시기 전에 먼저 훌륭한 성품을 개발하여 자격을 갖추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 주신 후에는 시범적으로 견습 기간에 있을 것이므로 선한 일을 어느 정도 하지 않는다면 "은혜를 잃고 구원을 잃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죽어가는 강도는 회심 전에나 후에나 아무런 선행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구원을 받았다면 확실히 주권적인 은혜로 받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죽어가는 강도의 구원은 세속적인 율법주의가 끼어들어서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로 돌려야 할 영광을 빼돌리는 것에 종지부를 찍는다. 잃어버린 죄인의 구원을 비길 데 없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기 하기보다 많은 가짜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영향력, 수단, 상황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설교자나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운 좋은 상황이나   신자들의 기도가 주요 원인으로 간주된다. 이 부분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종종 하나님은 죄인들을 회심시킬 때 기꺼이 인간의 수단들을 사용하시는 것도 사실이다.

하나님은 감사하게도 죄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고자 하는 우리의 기도와 노력에 종종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은 불신하는 자들이 자신들의 상태를 깨닫도록 섭리하실 때도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일들에 국한되지 않으신다.

인간의 수단에 제한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전능하고, 그가 원하기만 하신다면 은혜는 인간의 수단이 부족하다 해도, 불리한 상황에 처한다 해도 구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강도의 경우이다. 숙고해 보라.

그의 회심은 겉으로 보기에 그리스도가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도 구원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을 때 일어났다. 이 강도는 구주와 함께 예루살렘 거리를 지나왔고, 그가 십자가의 무게에 짓눌려 쓰러지는 것도 보았다.

강도라는 점을 감안해 보면 그가 주 예수를 본 것은 이 날이 처음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고, 그가 보았던 예수님은 매순간 연약하고 수치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의 적들이 이기고 있었다. 그의 친구들은 대부분 그를 버렸다.

대중은 이구동성으로 그를 비난하였다. 십자가를 지신다는 것 자체가 메시야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의 미천한 조건들이 시작부터 걸림돌이었는데, 십자가 처형은 분명히 그 생각을 더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 처형장 외에 다른 곳에서 그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은 특히 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조차도 십자가 처형 때문에 의구심이 일기도 했다. 거기 서 있던 군중 속에 그 누구 하나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라고 외치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믿음을 방해하는 장애물들과 어려움들 속에서도 그 강도는 그리스도가 구주이심과 주되심을 깨달았다. 그가 그 상황속에서 어떻게 그런 믿음과 영적 이해를 가질 수 있었는지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죽어가는 강도가 고난을 받고 피 흘리며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개입과 초자연적인 영향력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가 없다. 그가 그리스도를 믿음 것은 은혜의 기적이었다!♡

또 주목해야 할 것은 강도의 회심이 그날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일어나기 전에 있었다는 점이다. 어두워지기 전에, "다 이루었다"는 승리의 외침이 있기 전에,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기 전에, 땅이 갈라지고 바위가 터지기 전에,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백부장의 고백이 있기 전에, 그는 "주여,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외쳤다.

하나님은 주권적인 은혜가 돋보이고 주권적인 능력이 인정받도록 의도적으로 이 모든 일 전에 그를 회심시키셨다. 하나님은 아무도 주님은 존재를 자랑하지 않을 가장 불리한 상황에서 이 강도를 구원하기로 계획적으로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은 주님께 있다"는 것을 가르치시려고, 하나님의 섭리보다 인간의 수단을 더 높이지 말 것을 가르치시려고, 진정한 모든 회심은 성령님의 초자연작인 영향력의 직접적인 산물임을 가르치시려고 말도 안 되는 조건들과 상황들을 일부러 예정하셨다.♡

이제 우리는 강도와 그가 한 말들, 그가 주님께 한 요청, 그리고 우리 주님의 반응을 함께 살펴볼 것이다.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2-43).♡

Arthur W. Pink 가상칠언 그 의미와 묵상 p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