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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연합과 친교 52] 실천적 연합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연합과 친교 (Spiritual Union and Communio

[영적인 연합과 친교 52] 실천적 연합

En Hakkore 2024. 5. 9.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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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장(前章)에서 우리는 구원의 연합과 생명의 연합을 구별하는 주요 특징들 중 한 가지를 지적했다. 즉, 생명의 연합은 능동적인 반면에 구원의 연합은 수동적이었다. 말하자면, 중생시에는 우리 안에서 무엇인가 이루어졌지만 구원에 있어서는 무엇인가가 우리를 필요로 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 인도되고 그리스도를 꼭 붙잡고 충실히 붙어있는 우리의 자발적인 행동을 필요로 한다. 또한 구원자와 구원을 받은 자 사이에 존재하는 실천적 연합에 있어서도 무엇인가가 요구되고 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그냥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나의 멍에를 메고'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우리가 맡아야 할 자발적이고 지각있는 행위이다. 그 비유는 매우 명백한 비유이다. 전에는 소가 넓은 들판을 마음껏 다녔지만 이제는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할 자유가 더 이상 없다. 즉, 소 주인의 뜻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멍에'는 복종을 말하며 이와 같이 믿는 자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 믿는 자는 그 스스로 그리스도의 요구하심에 복종하며 주님께 머리 숙이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배되어지고 쓰임받기 위해 복종의 자리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는 지금 말한 사실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육적이거나 영적인 범위도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 그 누구에게나 '멍에'는 싫은 것이다. 불법정신이 사방에서 난무하고 금지를 따분하고 불쾌한 것으로 생각하는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남녀평등과 여성의 권리와 남자의 지도자 지위에 대한 거부를 세계의 도처에서 부르짖고 있다. 현대의 아내는 변덕스런 마음을 품은 채 '인도되어지는 것을 기뻐한다'. 그러나 지배받기는 거절한다. 그녀의 남편에게 온순하게 순종한다는 생각은 그녀의 의향과 생각과는 정반대이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오늘날 종교의 영역에서 널리 퍼져 있는 저급한 수준을 나타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희망을 건다고 고백하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의 '멍에'를 거절한다. 그들은 지옥으로부터 구원되기를 원하지만 그리스도의 계명을 원하진 않는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따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과거에 목사들은 자주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고 분명히 이야기했다. 슬프게도 오늘날 강단에서는 방종하는 세대를 오히려 선동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변화하지 않으셨으며 그의 거룩함에 대한 요구를 낮추시지도 아니하셨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가는 곳에 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우리가 그의 '멍에'를 메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예속과 복종의 바로 그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으셨으며"(롬 15:3),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마 16:24)라고 명령적으로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계시하신 뜻에 완전히 복종하여 사셨으며 우리에게 "그 자취를 따라(벧전 2:21)야 한다는 '실례'를 남기셨다. 우리가 늘 "그와 함께 영광을 받게"(롬 8:17) 되려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하는 것이다.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는가"(암 3:3). 여기에서 다시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 사이에 존재하는 실제적 연합이 우리 앞에 제시된다. 거기에 진정한 교제가 있을 수 있다면 우선 조화되고 마음과 뜻이 서로 일치해야 한다.

모든 참다운 교제는 연합을 토대로 이루어지며 '동행'이란 말이 암시하듯이 보이는 곳에 있는 것은 생명의 연합이나 구원의 연합이 아니라 실제적 연합이다. 즉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실천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의 평균적 생활은 이에 훨씬 못미친다)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다"(빌 1:21)라는 한 마디로 요약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시며 그러므로 어떠한 불법의 길에서도 우리와 동행하지 않으실 것이다. 즉,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겠는가?"(고후 6:14, 15).

이상적인 결혼생활이 한 편에 대한 사랑의 권위와 또 다른 편에 대한 사랑의 복종의 이행으로 말미암을 때만이 유지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요 14:15)고 말씀하신다.

복종은 그리스도와의 실천적 연합과 친교의 근본적인 조건일뿐만 아니라 없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왜냐하면 봉종함으로써만이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가 죄악이 들어오기 전의 상태, 즉 사랑으로 다스리고 사랑으로 복종하는 상태로 회복되기 때문이다.

타락하기 그 이전에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완전한 만족이 있었다. 창세기 1:31 중에 "심히 좋았더라"고 명백히 나타나 있듯이 창조주와 피조물, 이 양자에게는 순수한 만족이 함께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간 안에 하나님이, 하나님 안에 인간이 상호 내주하게 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호내주는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의식적으로 실천할 수 있게 해주는 통로이다. 오직 이렇게 함으로써만이 그들을 주권자와 종의 상대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Arthur W. Pink 영적인 연합과 친교 p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