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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성장과 친교 51] 실천적 연합 1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연합과 친교 (Spiritual Union and Communio

[영적인 성장과 친교 51] 실천적 연합 1

En Hakkore 2024. 5. 9. 17:52

장문

하나님의 '구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구조나 해방을 말한다.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인가? 죄의 형벌과 세력과 실제로부터의 구원이다. 구원은 무엇으로 말미암은 것인가? 아버지 하나님과 그 아들과 성령의 연합적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참그리스도인이 그 자신을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고 또 다른 의미에서는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무슨 뜻인가? 이것은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세 가지 시제로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구원받았다. 진정한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구원되어가고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받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성이 마음 속에 남아 있어서 비록 우리를 지배하는 완전한 죄의 세력이 파멸되었다 할지라도 그 죄성은 여전히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의 세력과 오염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타락으로부터 그들을 소생시키고 그것의 영향에서 그들을 구원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교제의 관계로 그들을 복귀시키는 것이다. 구속받은 자들이 처음 아담으로 말미암아 상실했던 것보다 마지막 아담을 통하여 얻은 것이 더 많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사실이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게 되는 이익은 다음 장에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타락하기 이전에 우리는 아담 안에서 하나님과 행복한 교제를 이루었고 우리의 본성은 신성과 조화되었으며 우리의 기쁨은 하나님의 뜻을 기꺼이 순종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 하나님과 인간은 일치되었고 각각이 다른편 안에서 기쁨을 찾았다. 그러나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차이는 주권자와 백성으로 명하셨던 관계에 의해 알맞게 지속되어졌다. 오직 주권자와 백성으로서만이 하나님과 인간의 상대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권위를 행사해야 했고 인간은 복종을 해야 한다. 거기에는 권위와 복종이 함께 거하고 있었다. 즉 하나님은 다스리시고 인간은 복종하였다.

그와 같이 서로 일치하여 존재함으로써 나날이 더욱 친근해지고 확신감을 갖게 되었다. 인간은 점점 그가 가지고 있던 계명(그 계명들은 그의 본성과 뜻을 알게 해주는 것이었다)의 굉장한 장점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복종함에 따라 성장하는 지력과 사랑을 더욱 기뻐하셨다.

이와 같이 처음엔 피조물이 거룩함과 행복함을 체험할 수 있었다, 즉 그의 조물주의 계시하신 뜻에 완전히 복종하여 행할 때의 거룩함과 이 보증된 기쁨의 교제에 있어서의 행복함을 체험할 수 있다. 이리하여 창조주와 피조물의 상대적인 지위와 관계는 완전하게 지속되어갔다.

그러나 슬프게도 죄가 들어왔다. 즉 하나님의 속박은 잔인하고 지루하며 그들이 크게 되기를 소원할 자유가 있다고 하던 뱀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브에 의해서 죄가 들어오게 되었다. 그것은 반역하는 불순종의 명백한 행위였다.

즉, 그 결과 틈이 생겼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더 이상 조화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미 얻었던 행복한 교제가 깨어졌다. 이제부터 하나님과 불순한 인간은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아담과 이브는 낙원으로부터 쫓겨나게 되었다. 그들의 모든 후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서 낙원 밖에서 태어났다.

맨 처음 아담의 모든 자손의 이마 위에 쓰여진 그 놀라운 말씀은 "멀리 있어"(엡 2:13),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8)라는 것이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는 말씀은 모두 똑같이 해당되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기"(시 58:3)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의 백성을 구원하실 때 하나님께서 이 무서운 상황을 어떻게 지시하셨는지 우리는 앞에서 살펴본 바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머리셨고 그들의 구원은 그리스도께 위탁되었다. 즉 그들 사이에는 연합이 있게 된 것이다.♡

첫째로, 창세 전에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을 때의 신비적 연합이다.

둘째로, 일체적 연합인데 즉 그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대표자요, 보증인으로 행동하셔야 했다.

세째로, 생명의 연합인데 즉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본성을 입으셨을 때의 성육신에 의한 생명의 연합과 그들이 그리스도의 본성의 참여자가 되었을 때 중생에 의한 생명의 연합이다.

네째로, 구원의 연합인데 즉 영혼(먼저 소생된)이 믿음을 발휘하고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에게 굳게 결합할 때의 구원의 연합이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죄인들은 그들을 위해 보증하신 구세주의 속죄의 법적 은혜에 들어가게 된다. "믿는 자마다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 입어 의롭게 된다"(행 13:39). 구원의 연합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제 회개하는 마음은 그의 모든 죄를 위해 완전하고 충분한 희생이 되신 그리스도께 의지하게 된다. 그의 인생행로를 철저히 변화시킨 신자들은 새로운 관계의 접어들게 되는데 그 새로운 관계로 말미암아 그는 그의 미래의 모든 행위가 규정된다. 그는 더 이상 그 자신의 것이 아니며 자신을 주님께 드렸다(고후 8:5).

이제부터 주님을 기쁘게 하고 영광되게 하는 것이 그의 최고의 관심사이어야 한다. 혼인할 때 결혼식이 결혼 생활의 시작인 것과 같이 영혼이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주님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은 단지 그리스도의 생활의 시작에 불과하다.

신부가 다른 모든 연인들을 버리고 그녀의 남편에 대하여 정숙할 것과 모든 것에서 남편에게 순종할 것을 엄숙히 맹세한 것과 같이 신자는 다른 모든 주와의 관계를 끊고 그리스도께만 복종할 것을 약속했다(사 26:13).

결혼의 목적이 자식의 출산인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다.(롬 7:4)

그러므로 결혼은 새로운 시작이며 사물의 새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새로운 생활의 출발점이다. 아마도 여자가 결혼하기 전에는 그녀를 보호해줄 아버지나 형제가 없다면 이 세상에서 혼자일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을 돌봐야 했고 그녀 자신의 직업과 진로를 계획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결혼의 멍에에 메어져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그녀를 더욱 사랑하고 그녀의 마음을 설득하여 이제 그녀의 공급자요 보호자가 되는 유일한 책임을 맡은 한 사람에게 그녀 자신을 주셨다.

이제 남편의 사랑의 계명에 온순히 순종하고(벧전 3:1-6 참조) 남편의 흥미를 돋구어 주려고 애쓰며 남편이 그녀를 위해 마련한 집을 꾸미는 것이 그녀의 행복이다. 남편의 뜻은 절대적이며 아내의 행복이 그의 관심사이며 남편의 요구에 순종하여 행동하는 것이 그녀의 행복이다.

이와 같은 것이 결혼생활의 이상이다. 한편으로 사랑의 권위는 가장에 의해 유지되며, 또 한편으로 사랑의 순종은 본분을 다하는 헌신적인 아내에 의해 기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구속자와 그의 구속을 받은 자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와 구원받은 영혼이 시작하게 되는 새로운 사물의 질서에 대한 상징이다.

혼인은 그 책임과 특권과 의무와 기쁨과 더불어 결혼의 연합을 이루게 하는 한 가지 수단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구원의 연합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한 가지 방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시작된 새로운 관계를 입증하는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에 이루어진 생명의 연합이(신생 때에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 연합) 영혼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의 연합을 이루게 하는 것과 똑같이 그 다음에 차례로 구원의 연합은 그리스도와 함께 실제로 연합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리하여 구원을 받기 위해 예수께로 나아오는 죄악에 지치고 양심에 무거운 짐을 진 죄인들에게 주 예수께서는 맨 처음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멍에'란 두 마리의 소에 마구를 맨 것이며 그래서 소들은 함께 걷고 일해야 한다. 또한 주께서는 그 자신과 그의 백성 사이에 방금 이루어진 관계를 설명하시기 위해 이 비유를 이용하셨다.

Arthur W. Pink 영적인 연합과 친교 p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