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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연합과 친교 54] 실천적 연합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연합과 친교 (Spiritual Union and Communio

[영적인 연합과 친교 54] 실천적 연합

En Hakkore 2024. 5. 9.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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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실천적 연합과 그리스도와의 친교는 우리가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붙잡음으로써 성장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께로의 연합은 그의 아들의 형상을 실제로 닮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다.♡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도록"(예속되고 복종하도록) 우리는 "원수(즉 죄, 사단, 세상, 율법의 저주, 하나님의 진노)의 손에서 건져졌다"(눅 1:74, 75).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우리로 두려움이나 육욕에 빠져도 좋게 하기 위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지 아니하고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로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그리스도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 살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오게 하셨다. 우리 구원의 첫 시작은 한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즉 우리의 굳은 마음을 녹이기 위한 것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그리스도께 사랑의 순종을 하게 하기 위함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되고 증거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구속자와 구속 받은 자 사이에 존재하는 연합은 단순한 연합이 아니라 복합된 연합이다. 즉 우리를 주님께 묶는 것은 단 하나의 밧줄이 아니라 여러 줄이 결합된 밧줄이다. 전장에서 우리는 신자와 그리스도 사이에 존재하는 연합의 결속을 수많은 서로 다른 고리로 되어 있으면서 뗄 수 없이 결합되어진 황금사슬로 비유했다.

그 사슬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지상에 있는 그의 백성 각자에까지 이르게 된다. 믿음의 손이 각기 다른 고리를 붙잡았기 때문에 잡고 있는 고리 바로 위의 고리가 차례로 나타나게 된다.

우리는 위에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그 고리를 검토해 보았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 경험에 있어서 우리는 반대 순서로 그것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처음에 가장 낮은 고리를 잡고 그 다음에 더 높이 있는 고리로 올라가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있는 위치로부터 우리는 단지 낮은 고리에 의해 더 높은 고리를 식별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살펴보자.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구원의 연합의 개인적 증거를 가지고 있음은 오직 그리스도와의 우리의 실천적 연합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즉, 내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뜻에 따라 복종의 길에서 그와 함께 행하면서 그분께 인격적 복종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내 죄가 용서받았다는 가정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일치의 증거를 얻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와의 구원의 연합에 의해서 뿐이다. 즉, 내가 내 마음에 다른 모든 요구들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그리스도께서 주되심에 굴복하지 아니하며 내게 하나님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하신 그의 희생을 온전히 신뢰하지 아니한다면 내가 전에 거듭났다고 할 수 있는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동맹적, 그리고 신비적 일체가 되었다는 확신을 얻은 것은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연합에 의해서 뿐이다.♡ 즉, 내가 영적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하게 되었음을(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욕망과 새로운 목적과 노력에 의해서) 확실히 깨달을 수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나의 보증인으로서 행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만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제 방금 지적한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지금 여러 측면을 가진 주제 중에서 가장 중요한 면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뒤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더 자세히 고찰해봄이 좋겠다. 이 점에 대해 잘못 생각한다면 참으로 심각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의 구원의 연합을 했는가 하는 문제를 올바로 결정할 수 있는 길이 오직 그리스도와의 실천적 관계를 어찌 확인해 보지 않겠으며 내가 진정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있는지, 그리고 그리스도의 뜻에 복종하고 있는지, 거룩한 형상을 닮아가고 있는지를 어찌 진지하게 질문해 보지 않겠는가?

또한 나의 매일의 생활을 진정으로 통제하고 있는 것이 내 본성인지, 그리스도의 권고하심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제 그 심오한 의미와 충분한 범위에 대해 생각해볼 때 우리는(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요구하심과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뜻을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모든 권고를 '내게 나아오라'와 '내 안에 거하라'는 두 가지 말씀 속에서 요약해 볼 수 있다.

이 요구들 중 첫째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구원으로 결합되기 위해 그리스도께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리스도와의 실천적 연합이 보증되고 지속될 수 있는지 아닌지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나아온다'는 것은 우리가 그를 반대하는 모든 것에서 등을 돌리고 다른 모든 우상과 의존물들을 버리고 마음으로부터 그리스도께 완전히 굴복하고 신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리스도께 '나아온다'는 것은 선지자요 제사장이며 왕이신 온전하신 그리스도께로 전(全) 영혼이 돌아선다는 뜻이다.♡

감성과 지성과 의지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믿고 섬기기 위하여 초자연적으로 그리스도께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나아온다'는 것은 기도드리기 위해 당신의 손을 올리거나 앞으로 나와 복음 전도자의 손을 잡거나 '결신' 카드에 서명하거나 '교회'의 회원이 되거나 사람들의 '많은 꾀'(전 7:29)와는 너무나 다르다.

누군가가 진정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오기 이전에 지식이 초자연적으로 빛을 비추어져야 하며 마음이 초자연적으로 변화되어야 하며 고집이 깨어져야 할 것이다. 자연인은 그의 마음 속에 제일 먼저 이 세상의 일을 생각한다. 즉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최고의 관심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너무 거룩하시기 때문에 자연인이 죄를 사랑하는 것을 용납치 않으신다. 또한 그의 명령은 너무 엄중하여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눅 14;26, 27)은 너무 엄격해서 인간의 현세적 길과는 어울릴 수 없다. 중생하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주권되심에 복종하지 않으려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만유의 주가 되시거나 전혀 주가 되시지 않거나 해야 한다. 그는 어떠한 경쟁자도 갖지 아니할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경쟁의 위치에 있는 모든 것을 단념해야 한다. 육적인 것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끊어 버려야 한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제자의 상징이다. 즉, 그것은 단순히 몸에다는 금배지가 아니다. 마음을 억제하는 자기부정과 자기 희생의 원리가 곧 십자가이다. 우리는 선지자이신 그리스도께 나아와야 하며 그리스도에 의해 가르침받아야 하며 제사장이신 그분의 속죄하심과 중재하심에 의지해야 하며 왕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지배받아야 한다.♡♡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은 더 이상 자신 안에 있는 어떠한 것에도 의존하지 않기 위하여 자신을 떠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주권하심에 머리 숙이고 그이 멍에를 받아들이며 십자가를 지고 서슴치 않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진정으로 이렇게 행하는 자는 참으로 적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10)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Arthur W. Pink 영적인 연합과 친교 p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