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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연합과 친교 49] 구원에 이르는 연합 3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연합과 친교 (Spiritual Union and Communio

[영적인 연합과 친교 49] 구원에 이르는 연합 3

En Hakkore 2024. 5. 9. 17:51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다른 모든 것에서 떠나 오직 그리스도만을 굳게 붙잡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소생시키시는 의도는 우리로 그에게로 돌아서서 그를 믿게 하려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 할 때에야 우리는 구원되기 때문이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엡 2:8). 사실 우리는 우리의 믿음 때문에 구원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것이 없이는 구원될 수 없다. 청교도인 토마스 브록스는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적절한 것과 같이 믿음도 역시 그러하다"고 올바르게 단언하였다.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 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행 10:43).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는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친다"(롬 3:22). 그런데 그들이 믿게 되었을 때 그것이 그들에게 미치게 된다.

그리스도는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롬 3:25)이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피는 그것을 간구하는 자에게만 효력이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은, 우리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9)라고 편지를 썼다.

서로 다른 일들을 혼동하지 말자. 택함받은 자들이 창세 전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구원되었으며(딤후 1:9) 그들의 머리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을 때 대표적으로 그리고 실제로 구원되는 것은 바로 그들이 "진리를 아는 데 이를"(딤전 2:4) 때이다.

그리스도를 신뢰하게 되면 우리는 구원에 대한 지식 이상의 것을 얻게 된다. 즉 그것은 우리에게 구원 그 자체를 가져온다. 개인의 죄가 아직 '용서함'을 받지 않는 곳에는 분명히 구원이 실제로 주어질 수 없으며 그가 죄사함을 받게 되는 때는 바로 그가 믿을 때이다(행 10:43).

또한 믿음 그 자체가 구원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즉 구주는 그리스도이고 믿음은 구원을 얻기 위해 그를 붙드는 것이다. 음식만이 굶주린 사람을 죽음에서 구할 수 있는데 그가 음식에 손을 대지 않는다면 음식은 그에게 아무 효과도 낳지 못할 것이다. 그를 구원하는 것은 먹는 행위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가 살고자 한다면 음식을 먹어야 한다.

한편으로,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리스도를 굳게 잡고 있다는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증거요 결과이다. 다른 한편으로, 믿음은 그리스도에게로 우리를 연합시키며 이것은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으로부터도 분명히 나타나 있다.

즉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0, 21)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엡 3:17)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즉 영혼 속에 그리스도의 참된 실체를 부여해 주는 것은 바로 믿음이다. 그러므로 앞 장에서 다루었던 것과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면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즉 생명적 연합을 이루는 데 있어서는 능동적이다. 여기에 그 순서가 나타나 있다. 즉 "오직 내기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2).

(그리스도의 살리시는 영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되었거나 '붙잡힌 바'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그를 붙잡는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붙잡지 않으시면 우리는 그를 붙잡을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붙잡힌 바 되었기 때문에, 영혼은 이제 그에게로 가까이 나아가 그와 자신을 결합시키고 마치 자기 것이나 되는 것처럼 믿음으로 그를 소유한다.

그리고 이 연합으로부터 우리의 칭의, 성화, 성도의 견인, 영화가 뒤따른다. 우리의 보증자께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일체적 연합이 절대로 필요하였었다.

생명적 연합은 생명과 은혜와 거룩한 원리가 영혼에게 나누어져서 그것을 받은 자들에게 영적 행위를 수행하고 영적 생활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기 위하여 절대로 필요하였다.

믿음의 연합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확증이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 새겨지게 하기 위하여 절대로 필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가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사신(호 2:19) 결과이다. 왜냐하면 우리 사이의 결혼 관계를 유지하게 해 주는 것은 바로 이 믿음이고 우리 편의 개인적인 찬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셨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그 그리스도를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다른 모든 것, 즉 이 세상의 유혹과 자기 자신의 의를 신뢰하는 것으로부터 돌아서서 자신의 유일한 주님으로서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내신 조건으로 그리스도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우상에서 등을 돌리고 룻과같이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라고 말하는 것이다.

중보자는 어느 한 사람만의 중보자가 아니며 양편의 상호적인 동의를 요구하므로 우리 편에서 그리스도를 중보자로서 개인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이로 인하여 상호적인 연합이 되는 것이다. 여자가 그녀의 완전한 동의로써 한 남자를 남편으로 받아들이듯이, 신자는 그리스도를 자기의 유일한 주님 곧 구주로서 받아들인다.

이 연합을 옛 작가들 또한 여러 가지로 불러왔다. 그러나 슬프게도 대부분의 연대 저술가들은 놀랍고도 은혜로운 이 주제에 대하여 거의 알고 있지 못한 것 같다.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자발적' 연합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우리 편에서 전혀 자발적으로 하지 않은 앞의 여러 가지 연합들과 이 연합을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즉 이 연합은 우리 자신의 의지로 행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일체적', 혹은 '믿음의' 연합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믿음으로써 그 연합이 이루어지며 우리의 자발적인 행위의 성격을 좀더 분명히 규정해 주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결혼의' 연합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그 말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사랑하는 주님 혹은 남편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을 나타내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구원에 이르는 연합이라고 부르기를 더 좋아했는데 그것은 우리의 독자들로 하여금 그 진리의 바로 이 면을 좀더 주목해 보도록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며 그것은 또한 다른 용어들보다도 더 많은 표현해 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Arthur W. Pink 영적인 연합과 친교 p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