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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구원 55] 감정을 통하여 그리스도께로 나아감(2)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구원 (Doctrine of Salvation)

[영적인 구원 55] 감정을 통하여 그리스도께로 나아감(2)

En Hakkore 2024. 4. 13. 08:01

서론에서 어느 정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연적인 감정은 하나님에게서 떠나, 유한하고 감각적인 일들에만 몰두해 있으므로 그는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종이 열심히 그를 복음이라는 사랑스러운 음악으로 매혹시켜 보려 하지만 마치 귀머거리 뱀처럼, 그는 귀를 닫고 만다. 그것은 마치 주님께서 큰 잔치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들은 다 일치하여 사양하였다"(눅 14:18). 하나는 그의 땅을, 다른 하나는 장사를, 또 다른 하나는 그의 사회적 교제를 더 좋아했다. 마음 속에 아주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힘이 아니고서는 그 어느 것도 죄와 사단이 인간에게 걸어 놓은 마법을 풀 수가 없으며 그의 마음을 멸망하는 것에서 멸망하지 않는 것으로 돌아서게 할 수 없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 안에서 신비하고 저항할 수 없는 역사를 통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은혜의 무한한 풍성함을 통하여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 보임으로써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심어 줌으로써, 그리고 그들을 감동시켜 그리스도의 친절한 초대와 귀중한 약속을 붙잡도록 함으로써 이 일을 행하신다.

아주 다행히도 이것이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 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아 5:4)라는 말씀 속에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마음의 문 혹은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믿음의 문"(행 14:27)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닫혀져 있음과 그리스도의 사랑의 대상은 일어나 그에게 문 열어 주기를 싫어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환영받지는 못할지라도 그의 사랑은 꺼지지 않고, 그는 조용히 (부수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초대받지 않은 채로 들어간다.

'문'을 여는 그의 '손'은 그의 선택된 자들의 마음 속에 있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고 그 마음을 얻으시는 그의 무한한 은혜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행 11:21 참조), 그가 성령에 의해서 은혜롭게 들어오시게 된 결과는 "나의 마음이 동하여서"라는 말씀 속에 나타나 있다. 이것은 그가 들어온 후의 감정의 동요에 대한 비유이다.(사 63:15; 몬 12 참조 - 여기에서의 설명은 아가서에 관한 죤길의 주석을 참조한 것임)

마음이 진실로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자아에서 그리스도에게로, 죄에 대한 사랑에서 거룩에의 사랑으로 돌아설 때 그것은 참으로 큰 은혜의 기적이다. 에스겔 36:26 속에서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 하신 하나님의 성약의 성취가 바로 이것이다.

아무리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투자한 것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을 위해서는 기꺼이 돈을 버리는 것이다. 자연인은 영적인 일보다 물질적인 일을 더욱 귀중하게 여긴다. 그러나 중생한 사람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는데 이것은 그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적인  사랑만이 마음을 그리스도께 결합시키는 것이다.

필수적인 전제조건은 구원에 이르는 진리의 지식뿐만 아니라 그 진리의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한다"라고 데살로니가후서 2:10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이 말씀에 깊이 주의를 두지 않으면 잘못된 결론이 나올 수 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진리의 사랑이다.

진리에 대한 사랑은 가지고 있지만 진리의 사랑은 가지고 있지 못한 자들이 있다. 우리는 러셀파(Russellites)를 만나고 그리스도 형제단(Christadelpians)들과 함께 살기도 한다. 그런데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즉 그들은 하루의 고된 일과가 끝난 후에는 저녁 내내 성경을 부지런히 공부하며 보낸다.

그것은 단순히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열심은 수년 동안 지속되어 온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성경은, '염주' 나 '묵주' 가 독실한 카톨릭 교도들에게 있어서처럼 아주 소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자연적인 '사랑', 즉 그에 대한 열렬한 헌신 또한 있는 것이다.

독실한 로마교 가정에서 양육된 사람이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깊은 존경과 참된 사랑을 지니고 자랐듯이, 신교도 양친으로부터 아주 어렸을때부터 예수께서 그를 사랑한다는 말씀을 들으며 주의깊게 훈련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에 대한 실질적이지만 육적인 사랑을 지니고 자란다.

그 능력을 체험해 보지 못한 모든 성경의 교리 안에는 역사적인 신앙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바리새인의 경우에 있어서처럼), 하나님의 진리의 어떤 한 부분에 대한 육적인 열심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새롭게 된 것은 아니다(돌밭 같은 마음을 가진 청중의 경우에서처럼, 마 13:20).

말씀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즐거운 감정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 곳에는 "일의 뿌리"(욥 19:28)가 결핍되어 있다. 또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에 그를 따라가며 슬피 울던 여인들의 무리처럼, 눅 23:27,28) 고통받는 구세주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맷돌처럼 완고한 상태 그대로 있을 수도 있다. 또 (헤롯의 경우처럼 막 6:20) 하나님의 빛을 즐거워할 수도 있지만 지옥에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진리의 사랑과 대조되는 진리에 대한 사랑이 있고, 그리스도에 대한 영적 사랑과 대조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육적인 사랑이 있기 때문에, 나의 사랑은 어느 쪽인가를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사랑들'을 다음과 같이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육적 사랑은 편파적이지만 영적 사랑은 공정하다. 육적 사랑은 성경이 명령하는 의무가 아니라 성경의 교리를, 성경의 훈계가 아니라 성경의 약속들을, 그리스도의 요구가 아니라 그의 축복들을, 그리스도의 왕으로서의 통치가 아니라 그의 사제적인 임무를 존경한다. 그러나 영적인 사랑을 소유한 자는 그렇지 않다.

둘째로, 육적 사랑은 일시적이지만 영적 사랑은 지속적이다. 육적 사랑은 사적인 이익이 교차되면 멈추지만 영적 사랑은 그렇지 않다.

세째로, 육적 사랑은 사라지기 쉬우며 연약하고, 영적 사랑은 지속적이며 강력하다. 육적 사랑은 다른 기쁨과 겨루게 되면 빨리 사라지고 다른 감정들을 조절하도록 설복하지 못하지만 영적 사랑은 마음을 지배하고 죽음처럼 강하다.

네째로, 육적 사랑은 그 소유주를 향상시키지 않지만 영적 사랑은 그 사람의 생활을 변화시킨다.

구원에 이르도록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돌아서고 그에게 고정되는 감정들이라는 사실은, 그 마음이 그리스도로부터 떠나기 시작하는 타락의 본성에 대해 고찰해 봄으로써 좀더 잘 설명해 볼 수 있다. "너는 너희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버렸다"하는 요한계시록 2:4의 말씀에서 지성이 우리를 감정에 어떤 영향을 끼쳤느냐 하는 것으로써 우리가 실제적으로, 그리고 참되게 그리스도에게 돌아왔느냐 하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한 예를 마태복음 26:75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여기에서 "생각나서"라는 말은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녹인 은혜로운 기억이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때는 언제나 그러하다. 나는 겸손하여지지 아니하고서도 과거의 죄를 회상할 수 있다. 나는 진실로 감동된 감정을 지니지 않고도 기계적이고 사색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할'지도 모른다. 마음이 강력하게 감동을 받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지성의 기능을 살려 주시는 바로 그 때문이다.

Arthur W. Pink 영적인 구원 p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