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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구원 53] 지적 능력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나아감(4)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구원 (Doctrine of Salvation)

[영적인 구원 53] 지적 능력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나아감(4)

En Hakkore 2024. 4. 13. 07:59

5. 단순히 이론적이고 관념적인 지식과 이 영적이고 생명적 지식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그 결과를 보아서 알 수 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라"(살전 1:5)고 했으며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았다"라고 그 다음 구절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논리적이고 수사학적이며 설득력있는 능력으로 줄 수 없는 그 도를 성령께서 효력있게 부여해 주셨다. 그 도는 양심을 찔렀고 죄가 만든 상처를 다시 찢으며 그 곪은 상처를 드러내었다. 그 도는 심지어 혼과 영과 영이 쪼개어지기까지 그를 찔렀다. 그 도는 그들 자신의 좋은 의견을 말살하였다. 그 도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타는 듯한 분노를 깨닫게 하였다.

그 도는 그러한 비참한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손에서 자비를 받을 수 있겠는가에 대해 자기 자신에게 진지하게 자문하게 하였다. 그 도는 영혼의 큰 의사를 보고자 하는 믿음을 전달해 주었다. 그 도는 이 세상의 불쌍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기쁨을 주었다.

성령께서 지각에 비추어 주신 그 빛은 매우 효과적이다. 그러나 인간이 그들의 연구를 통하여 얻은 그것은 그렇지 못하다. 보통 물과 강력한 광천수는 색깔은 똑같지만 그것의 맛과 효력은 판이하게 다르다. 육적인 사람도 영적인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모든 이론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는 "열매가 없는" 자이며 맺을 수도 없다(벧후 1:8).

그가 가진 빛은 효험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마음을 깨끗케 하지 못하며 그의 의지를 새롭게 하지 못하고 그의 생을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신앙을 고백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하는 거룩한 진리에 대한 지적 지식은 비록 그 두뇌 속에 지식이 들어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실제적인 경건함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주시는 빛은 그 빛을 받는 자를 겸손하게 하고 낮추신다. 그러나 교육과 개인적인 노력에 의해서 얻어진 지식은 자만하게 하며 육적인 기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영적이며 구원에 이르는 지식은 항상 영혼으로 하여금 진심으로 순종케 하신다. 그리스도의 빛이 바울의 마음에 비추이자마자 그는 "주여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행 9:6)라고 물었다. 골로새 교인들에 대하여 사도는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실제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1:5,6)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단순한 지적인 지식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다"(롬 1:18). 그 지식을 소유한 자들은 논쟁하는 데 열중하며 그것에 대해서 이론을 주장하고 그들만큼 현명하지 못한 모든 자들을 멸시하고 경멸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의 생활은 흔히 수치스럽다. 그리스도의 구원에 이르는 지식은 영혼을 너무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탁월성 이외의 그 어떤 것도 다 배설물로 여기게 한다.

즉, 그의 영광의 빛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빛을 완전히 상실하게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단순한 교리적 지식은 그러한 효력을 내지 못한다. 그것을 소유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찬양을 소리 높여 노래하는 한편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욕심을 내고 있으며 일시적이고 감각적인 일들을 열심히 추구하고 있다.

자연인도 하나님의 일에 대한 진리를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 자체를 아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들의 문자로는 성경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영으로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건전하고 정통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방법은 꿀의 단맛과 식초의 신맛을 한번도 맛보지 못한 자가 꿀과 식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수많은 설교자들이 영적인 일들에 대해 정확한 개념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며"(딤전 1:7), 진리의 말씀 속에 숨겨있는 일들을 직접 보지도 못하고 맛보지도 못한 자들이다. 마치 별들을 연구하는 데 일생을 보낸 천문학자가 별들의 이름과 그들의 위치를 알고서 광도(光度)의 등급을 매기지만 그 별이 다른 사람들에게 인격적이고 특별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이 그들도 아무런 영향을 못 받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을 연구하는 자들이 성령에 의하여 초자연적이고 구원에 이르는 빛을 받지 못하면 그 경우와 같다. 사랑하는이여, 당신의 마음 속에 샛별이 떠올랐는가?(벧후 1:19).

그리스도에 대한 건전하고 지적인 지식과 생명이 있고 변화시키는 지식의 차이와, 그리스도를 성경에 나타난 대로 아는 것과 우리 속에 거룩하게 나타나신 대로 아는 것과의 차이는(갈 1:16) 육적인 지석이 분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육작인 지성은 그것을 경멸할 뿐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은 고린도전서 2:14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올바로 읽고 이해할 수 있다면 그 내용과 완전히 부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인에게는 "하나님의 일들이 미련하게 보인다"라고 말하지 않은 것을 주의깊게 주목하여 보라. 만일 그렇게 말했다면 저자는 그것을 해명하느라 애를 먹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성령의 일'이 미련하게 보인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은 이 구절의 세부적 내용을 자세히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의 일'을 용감하게 옹호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에 있어서는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한 자의 영혼 위에 역사하시는 그의 은밀하고, 신비로운 사역을 그들에게 강조할 때 그들에게는 그것들이 지극히 '미련하게' 보이든지 신비주의나 광신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새롭게 된 자에게는 그것이 훨씬 다르게 보일 것이다.

하나님의 택한 자 속에(골 2:12) 믿음을 불어 넣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사역은 '새로운 피조물'을 만든다. 복음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서 효력있게 역사한다. 그 다음에 성령께서 영혼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시고(갈 4:19) 믿음의 눈을 통하여 믿음의 대상, 곧 새로이 소생하게 된 자 위에 찍혀진 그리스도의 참된 '형상'을 이루신다.

영혼은 소생하게 됨으로 해서 그리스도를 알아 보는 능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외적인 대상의 형상이 눈 속에 형성되어지는 것과 같이 마음 속에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것이다. 내가 내 눈으로 어떤 사람이나 어떤 대상을 본다고 말할 때는 나는 이 사람이나 대상이 직접 낸 눈에 들어온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객관적으로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즉 나는 그것들을 본다. 그러므로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라고 말할 때나 그리스도는 "너희 안에 계신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라고 말할 때에 현재 육체를 가지고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직접 그리고 실제적으로 우리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는 이해하지 않는다.

그렇다. 영혼이 믿음의 눈으로 그를 보기 위해서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며 믿음의 실체와 대상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말씀 속에 그를 나타내신 것과 똑같이 정확하게 위로부터 들어오게 하신다. 그렇게 해서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며' 이와 같이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게 된다.(엡 3:17)

우리가 위에서 설명하고자 한 내용이 현세적 가시적 세계에 아름답게 나타나 있다. 물질세계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영적인 사역은 지극히 많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참으로 현저하다. 우리가 좀 더 영적인 지성을 가졌더라면, 또 우리의 눈으로 좀 더 빈틈없이 경계하였더라면 우리는 사방에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실재의 표시와 상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어느 맑은 날 맑은 물 속을 들여다 볼 때 그는 거기에서 반사됨으로 나타난 한 얼굴(자신의 얼굴)을 보게 된다. 물 밖에 있는 얼굴과 물 위에 있는 얼굴에 대해서 곧 바로, 그것은 두 개의 얼굴이 아니라 본래의 것이면서도 반사된 얼굴 곧 단 하나의 얼굴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물 위에 자신의 얼굴이 비추어져 있음으로 보이는 것은 것은 오직 하나의 얼굴 뿐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택한 자의 영혼 속에서도 역시 그와 같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그 형상이 다른 사람들에게 좀 더 분명하게 보여지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뜻이다.

Arthur W. Pink 영적인 구원 p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