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영적인 구원 51] 지적 능력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나아감(2)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구원 (Doctrine of Salvation)

[영적인 구원 51] 지적 능력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나아감(2)

En Hakkore 2024. 4. 13. 07:58

3. 그리스도에 관한 이론적 지식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오늘날 그 사실에 대해서 지극히 무지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야만 한다. 그리스도에 관한 이지적인 지식을 그에 대한 감정적인 지식으로 흔히 오해하고 있다. 정통이라고 해서 그것이 곧 구원은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에 관한 육적인 판단과 그에 대한 단순한 이지적 지식은 결코 죽은 죄인들을 그리스도의 발 앞으로 데려오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역사하심이 영혼 속에서 서로 화합하며 이해를 새롭게 하는 생생한 체험이 있어야만 한다. 고린도전서 13:2에서 명백하고 엄숙하게 우리에게 경고해 주는 바와 같이 예언의 능을 가지고 모든 지식을 알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자연인이 종교적인 교육과 개인적인 노력으로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떠한 영적이며 생명에 관한 지식을 갖지 아니하고서도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사역에 대하여 교리적인 완전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마치 소경이 노력과 근실함으로 여러 가지 실체와 물체들을 전혀 보지 못하고서도 이론적이고 관념적인 정확한 개념을 얻을 수 있다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라 할지라도 모든 지식이 다 효과적이고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롬 2:19)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경건하고 지식의 규모도 있으나 능력이 결여될 수도 있다. 즉 그것은 유대인을 가리켜 한 말이다. 그들은 성경으로 교육을 받았으며 그들 자신이 다른 사람을 가르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에 의해서 진리가 그들의 마음 속에 새겨진 것은 아니다.

'지식의 규모'라는 말은 그들의 두뇌 속에 그것의 모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자유롭고 유창하게 설교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참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대한 지식은 가지고 있지만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사도가 디모데후서 3:15에서 그것을  분류한 것과 같이 성령께서 기적적으로 역사하시는 사역으로 후자와 같은 지식을 영혼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여호와게서 말씀하시되 그들이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또 나를 알지 못하느니라"(렘 9:3). 이것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곧 이것은 주님으로부터의 어떠한 계시도 받지 않은 이교도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다. 손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그리고 그들의 한가운데에는 하나님의 성전을 그리고 그들에게 말해주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말씀이다.

그들은 그의 권위와 거룩함과 능력과 자비가 많고도 놀랍게 나타나는 사랑을 입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많은 지적인 지식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들은 영적으로는 그를 모르는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셨을 때에 그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관해서 눈으로 볼 수 있는 빛을 참으로 많이 받았다. 즉 그들은 그의 완전한 생애를 목도하였으며 그의 놀라운 기적을 직접 보았다. 그의 비길 데 없는 가르치심을 들었으며 자주 그와 직접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빛이 어두움에 비취었으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였다"(요 1:5).

오늘날도 역시 그러하다. 사랑하는이여, 당신들이 신약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자라 할지라도 구약 성경의 상징과 예언들을 철저하게 알고 있다 할지라도, 또한 성경이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모든 것을 믿고 열심히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친다 할지라도 당신 자신이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알지 못하는 자일 수도 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는 말씀은 중생하지 않은 자는 절대로 하나님의 일을 영적으로 통찰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상 그들은 자연적인 방법으로는 그 말씀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즉 그들은 이론적으로 그 말씀을 연구하며 심지어 찬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체험적이며 생명적인 방법으로는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분류가 지극히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사실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것을 예증하여 보자.

어떠한 음악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을 상상해 보라.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그것의 아름다움과 멋을 이야기해 주면 그는 그것을 주의깊게 연구해 보려고 결심한다. 그 사람은 음악 예술에 철저하게 정통하며 그 예술의 모든 법칙을 배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음악의 조화와 화음을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대 오라트리오를 듣는 것과는 대단히 다르다.

즉 이전에 단지 생각으로 그 이론을 알았던 것을 이제는 귀로 듣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더우기 하나님의 일에 대한 자연적인 지식과 영적인 지식과는 지극히 큰 차이가 있다.

사도는 "우리는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고전 2:7)라고 선포한다. 그는 그것이 그 자체가 비밀이라는 것을 단언할 뿐 아니라 그것이 여전히 "비밀한 가운데"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중생하지 못한 자는 그들이 듣고 또한 그들이 관념적으로 명확하게 이해했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 속에 있는 비밀을 알지도 못하며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다.

잠언 9:10에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단언하고 있다.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 이외의 하나님의 일에 대한 참된 지식은 없다.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지식, 곧 개인적이고 체험적이며 생명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육신의 사람은 그가 그것에 대해서 열심히 연구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가지지 못하며 얻을 수도 없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의 사진을 보았다면 나는 그의 사진에 의해서 내 마음 속에 형성된 그의 형상과는 지극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 속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와 "내 속에 나타나신"(갈 1:16) 그리스도 사이에는 더욱 큰 차이가 있다.

Arthur W. Pink 영적인 구원 p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