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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fe of David 21] 사울을 피해 달아남(사무엘상 19장) 본문

강해시리즈/다윗의 생애 (Life of David)

[The Life of David 21] 사울을 피해 달아남(사무엘상 19장)

En Hakkore 2024. 2. 16. 12:29

사무엘상 18장 마지막 절에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가 제공하는 예표적 모습 중에서도 가장 복된 측면을 보여 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다윗이 사울의 장군들보다 더 큰 전과를 올렸기 때문에, 다윗은 아주 큰 명성을 얻었다(much set by, KJV, 표준새번역")(30절). 이에 대한 난외주(欄外註)는 훨씬 더 시사적이다. "그의 이름이 심히 귀하게 되니라(precious, 한글 개역성경에는 이미 그렇게 번역되어 있다 - 역주)."

이것은 그의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은"(아 1:3) 분에 대한 얼마나 사랑스러운 예시인가! 그렇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분의 아버지와 그분의 백성 모두에게 "심히 귀하다." 그분이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셨기 때문이다"(히 1:4).

그렇다, 그분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빌 2:9)을 얻으셨다. 그분의 이름은 설명이 불가능할 만큼 귀하다. 사람들은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요 14:13).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견고한 망대"(잠 18:10)로 삼는다.

사울의 노골적인 적의

"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하였더니"(삼상 19:1).

앞 장의 마지막 문장과 이 장의 첫 문장 사이에서 나타나는 차이는 얼마나 생생하고 엄중한가! 그러나 아마도 영적인 사람들이라면 상황이 달리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사랑받는 자"(그것이 "다윗"이라는 이름의 의미였다)의 이름이 심히 귀하게 될 때 그의 적 - 여기에서는 사울에 의해 인격화되어 나타난다-의 즉각적인 분노를 목격하게 될 것에 대비해야 한다.

그렇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설명은 우리의 삶에 그대로 들어맞는다. 여자의 후손에 대한 뱀의 적의(敵意)가 그분의 "이름"을 높이는 것에 대해서보다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경우는 없다. 이것은 사도들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고 선포했을 때,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들에게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18절) 고 경고했다.

그리고 사도들이 말을 듣지 않자 그들은 사도들을 "채찍질한 후 " 다시 한 번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했다"(행 5:20)

다윗이 생명을 노렸던 사울의 앞선 음모는 수포로 돌아갔다. 다윗은 사울의 계획처럼 블레셋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다윗의 손에 죽었다. 그 결과 이새의 아들은 백성들 사이에서 전보다 훨씬 더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백성들 사이에서 높이 칭송되었다.

그의 대형(對型)이신 분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주 예수님을 박해하면 할수록, 백성들은 더욱더 그분을 따랐다.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그들이 예수를 찾으며"(요 11:53, 55-56).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증언들이 박해를 받을수록, 그분의 복음은 더욱 더 퍼져나갔다. 의심할 여지없이 스데반의 죽음은 하나님이 훗날 이방인을 위한 강력한 사도가 될 자의 양심에 가책을 주기 위해 사용하셨던 일들 중 하나였다.

초대 교회가 박해를 당했을 때와 관련해 우리는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행 8:4)라는 말씀을 듣는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사람의 노여움을 이용해 자신을 높이신다.

요나단의 탄원

사울은 점점 더 절망적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기 아들에게 다윗에 대한 자신의 격한 증오를 알리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발견하고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왕은 자기 아들 요나단에게 다윗을 살해하려는 저신의 계획을 숨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 아들은 자기 아버지의 적의에 공감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우리는 성경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게 된다.

"그가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 사울이 너를 죽이기를 꾀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아침에 조심하여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 내가 나가서 내가 있는 들에서 내 아버지 곁에 서서 네 일을 내 아버지와 말하다가 무엇을 보면 네게 알려 주리라"(삼상 9:2-3).

이런 참되고 사심 없는 우정을 목도하는 것은 복된 일이다. 우리는 요나단이 왕의 상속자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다윗에게 그가 처한 위험에 대해 충실하게 알려 주고 그 위험에 맞서 대책을 세우라고 조언하는 것을 보게 된다.

요나단은 자신이 사랑하는 친구에게 자기 아버지의 악한 계획에 대해 경고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해 왕에게 탄원하기도 했다. 그가 사울 앞에서 자신에게 화가 미칠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면서 친구를 위해 간청하는 모습(4~5절)은 아름답다.

요나단은 사울 왕에게 다윗이 그에게 잘못한 일이 없고, 잘못은커녕 그가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구해냈고, 그로 인해 왕좌 역시 구해냈음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왕이 어째서 이런 상황에서 "무죄한 피"(삼상 19:5)를 흘리려 하는지 물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요나단을 그리스도의 예표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는 그리스도와 생생한 대조를 이룬다.

요나단의 탄원은 다윗의 개인적 공로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이것은 우리의 중재자의 경우와는 정반대다.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께서는 온 우주의 왕 앞에서 자기 백성을 위해 탄원하실 때 그들이 행한 선한 일이 아니라 자신이 그들을 대신해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제공했던 완전한 희생 또는 순종에 근거해서 그렇게 하신다. 그분은 그들의 장점에 대해 탄원하실 수 없다. 오히려 그분의 완전한 희생이 그들을 위해 효력을 낼 뿐이다.

Arthur W. Pink 다윗의 생애1 p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