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영적인 성장 19] 성장의 성격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성장 (Spiritual Growth)

[영적인 성장 19] 성장의 성격

En Hakkore 2024. 4. 1. 11:30

이제 본 주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다루고자 한다. 하지만 이 일 자체는 쉬운 일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잘못된 견해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영적인 성장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이리라. 여기에 대한 잘못된 개념이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유포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그들은 불필요한 예속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 중에는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거의 진전을 보이고 있지 않지만 자기들로서는 꽤나 성장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의 의견을 들어 주지 않으면 상당히 화를 낸다. 그래서 이들을 깨우쳐 주기란 쉬운 문제가 아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꽤나 성장했으면서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심지어는 퇴보했다고 결론내린다. 이렇게 하는 것이 불필요하게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임을 주지시키는 일도 쉬운 문제는 아니다. 이들 두 경우, 잘못된 표준과 선입관념으로 말미암아 오류가 빚어졌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영적인 성장이 진정 무엇인가를 잘 모르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만약 어떤 이가 여러 계층의 기독교인들 중 여섯 명을 선별하여 영적인 성장의 개념에 대해 정의를 내려달라고 요구한다면, 그는 아마 응답자들의 견해가 다양하고 서로 엇갈림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진리의 일부분을 받아들임으로 다른 것도 맏아들이기 쉬운 것처럼, 어떤 오류에 빠짐으로 더 많은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우리가 소속해 있는 특정한 교파나 우리의 정해놓은 뚜렷한 형태의 '지경'으로 인해서(고후 10:16) 어떠한 형태의 그리스도인이 되느냐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것은 마치 토양의 성질에 따라 식물이 자라는 것과 같다. 이렇게 함으로 그 사람의 신학적인 견해가 어떤 특정한 형태로 주조되어 그것에 의해 그의 기독교에 대한 개념이 형성된다.

뿐만 아니라 그의 경건 생활이나 사생활까지도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어떤 특정한 교파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신앙체험은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다. 이러한 사실은 대부분의 주요한 복음주의 교파들의 경우에 해당하며 이는 또한 '모든 제도를 부인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귀가 잘 훈련된 사람은 목소리의 변량을 쉽사리 탐지할 수 있어서 어떤 쪽에서 그를 부르고 있는지를 간파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초교파적인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영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사람과 한 두 마디만 나누어 보아도 그가 어느 교단에 속해 있는지 분간해 낼 수 있다. 그의 명찰을 보지 않아도, 그의 입학원서를 보지 않아도 이것을 알아맞추는 데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대화하는 과정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에 대한 견해를 표명해 보라고 한다면, 그는 당연히 자기가 몸담아 배워 익숙했던 형태의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만약 그가 어떤 특수한 교파에 속해 있다면, 그는 침울하고 우울한 그리스도인상에 대해 묘사할 것이다.

만약 그가 전자와는 상반된 교파에 소속해 있다면, 그는 자신만만하고 패기있는 그리스도인에 대해 묘사할 것이다. 어떤 교파에는 가장 존경받는 신학자가 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교파들에 대해서는 '메마른 교리'를 주장한다 하여 혹평하는 자이며, 극단적으로 자기 개인의 주관적인 사상에 몰입해 있는 자이며, 또 어떤 자들은 신학도 체험도 필요없다고 하며, 그냥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만 해도 된다고 하는 자들이 있는 반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가장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자들을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손꼽는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인 성장의 성격, 이를테면 보다 흔히 사용되는 은혜 안에서 자라남의 성격에 대해 기술하려고 한다. 이따금 여러 교파의 저작자들이 흔히 지질러 놓은 오류로 인해서 여러분에게 치명적인 해를 안겨 주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각별히 주의하며 그러한 오류들을 피할 작정이다. 그들은 성경의 가르치는 바를 떠나 그들의 체험이나 다루는 정도였다.

그들은 영적인 성장의 본질적인 요소를 다루지 않고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을 다루었다. 그들은 은혜의 사역을 받는 자들에게 공통된 과제를 다루지 않고, 어떤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 예를 들면 신경질적이거나 우울한 환자들에게만 적용되는 예외적인 것들을 다루었다.

이 경우가 예술가나 조각가들의 경우와도 흡사하다. 그들은 평범한 인간들의 틀을 벗어나서 상을 일그러뜨림으로 모델을 삼는다. 그들이 그렇게 생겨먹었는지는 모르지만 보통 인간들의 상을 왜곡시키거나 일그러뜨린 것밖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것을 보고 나서 만족해 한다.

아 그런데 이것이 웬 말인가! 세속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종교계에서도 변태적인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보다도 더 많은 관심과 인기를 얻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적인 경력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작장이다. 첫째 이유로, 우리는 괴상한 사건만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호기심이나 만족시켜 주는 정도의 글을 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는 너무나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이기에 사회적으로 자신을 나타내길 원치 않는 분들의 개인적인 신앙생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 동안 우리는 어떤 사람의 내적인 사역을 다른 사람 앞에 나타내는 일은 합당치 못한 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도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느니라"(잠 14:10)란 말씀이 있다.

세째, 우리는 우리 자신의 특수한 개종 사건이나 우리의 신앙생활에 굴곡이 있었던 점을 말해야 할 만큼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네째, 우리의 회개과정에 나타난 특수한 요소들과 그 이후 신앙생활 과정의 어떤 것들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적용되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그것을 적용시켜 보고서 일치되지 않을 때는 잘못된 길로 빠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상에서 언급했듯이 우리가 본 주제를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만 제한시킴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계속해 나가는 과정에 당연히 반대의견이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앞서 말한 단락에 대해 이견을 제시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도 회개에 대해 기술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대답은 이렇다.

첫째, 바울은 신약성경 저작권들 중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회개에 대해, 그리고 그 이후 신앙체험에 대해 이야기했던 자이다. 이것은 예외적인 사건을 정칙으로 삼거나 독특한 사건을 전례로 만들기 위함이라는 사상과는 정반대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경우가 독특하다는 사실은 후세대에게 모본을 보이기 위해서 생겨진 사건이 아니다.

둘째, 그의 체험은 예외적이며 독특하다.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초자연적으로 나타나심으로,바울은 육안으로 그를 보았고, 그의 목소리를 들었으며, 그 이후 아무도 이런 체험을 하지 못했다.

세째. 그는 자기의 회개에 관한 설명을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나 지교회 교인들에게 적용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적들 앞에서 하였다(행 22장 참고: 바울은 여기서 그의 재판장 아그립바에게 공정한 재판을 해달라는 뜻에서 자기의 사생활을 변호했음),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은 일반적인 경우를 위한 행동기준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이 다메셋 도상에서 이러한 체험을 함으로써 사도의 직무를 감당할 자격을 획득했다.(행 1:22; 고전 15:8,9: 고후 12:11 참고)

Arthur W. Pink  영적인 성장 p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