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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론 (Sanctification)

[마지막회] 성화론의 도구(완결편)

En Hakkore 2024. 3. 31. 21:08

처음에 언급했던 것과 같이 본 장을 쓰는 우리의 주된 관점은 하나님의 도우심 아래서 죄로 인해 고통스러워하고 의심이 솟구치며 사단의 시험으로 고난을 당하는 백성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 있음을 무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한편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 늘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딤후 3:5,7). 그들은 우리가 지적한 것들처럼 정말 위험한 사람들이다. 반면에 경건치 않은 사람들,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는 자들이 있다(유다서 4절).

그런 것을 지성인의 견해로 말하면서 같은 짓을 남용하는 자들, 하나님을 모독하면서 마음의 평강을 얻고자 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사태가 도발될 수 있을지라도 그런 자들에게 어린아이의 상에서 떨어지는 작은 떡 부스러기의 필요성으로 거둬들이지 않는다.

제 이의 축복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자들과 스스로 온전히 거룩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빛 안에서 자기 자신들을 한 번도 바라보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의 죄 없는 완전함을 자랑하는 자들은 사단에 의하여 속임을 당하는 자들이요 진리가 그들 안에 없다(요일 1:8).

진실한 성도에게는 항상 이 두 가지가 병행한다. 자신의 사악함을 더욱 발견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고귀성을 더욱 깊이 절감하는 것이다. 신자에게 있어서 자신을 위한 모든 문제의 완전한 답은 그리스도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을 때까지는 가장 안전한 안식처는 없다. 그의 믿음이 정확한 몫은 평강과 즐거움이다. 💕

"너희는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다(온전하여졌다)"(골 2:10). 신자들은 지금 언약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거룩을 소유한 자이다. 그러나 현재 신자는 그리스도로부터 자신에게 흘러나오는 은혜 안에서 안전함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거룩함을 실행하는 믿음을 높이 사고 상을 베푸신다. 반드시 죄를 굴복시키거나 혹은 승리하게 됨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믿음을 가진 자로 하여금 자신의 유일한 소망으로서 그리스도에게 꽉 달라붙어 있게 하심으로 그렇게 하신다.

오 나의 사랑하는이여, 여러분 자신에게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음으로 만족하라.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모든 것임으로 만족하라. 오 진실로 그는 흥해야겠고 나는 쇠해야겠다고 고백하라(요 3:30).

은혜 가운데서 성장하는 것은 자기 자존감과 자기만족을 최대한으로 떨쳐버리고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를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다. 💕

이러한 경향은 중생할 때 신자 안에서 시작된다. 마치 겨자씨 하나가 마침내 큰 나무로 자람과 같다. 성도가 은혜 안에서 자라감으로써 그는 날로 부족함이 없음을 알게 되고 그 모든 것을 공급받기에 합당한 존재가 못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된다.

간청하는 영이 그의 마음에 더더욱 자리 잡게 된다. 성령께서 더욱 빛을 비춰주심으로써 신자는 거룩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그리스도가 그에게 주신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더욱 알아가게 된다. 성도는 자신이 너무나도 거룩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에게 보답해 드리지 못한 비천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를 싫어하고 탄식하는 교통함이 있다.

하나님과의 교제와 하나님이 빛이시기에 빛 가운데 걸어감은 신자에게 자기만족을 가져다주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도리어 자신에게 있는 어두움과 더러움 때문에 애통해 할 뿐이다. 더 밝은 빛은 지금 전에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성취한 것들, 승리한 것들, 기뻐하며 만족스럽게 여기는 것만큼 우리의 영혼을 망하게 하는 치명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일 사도 바울이 그에게 주어진 넘치는 계시에 의하여 고무되는 위험에 빠졌더라면 우리는 우리가 이룩한 영적 진보와 영적 정복과 뛰어난 영적 자질들에 대한 생각으로 얼마나 득의양양해 하는 위험에 빠지지 않았겠는가?

그러한 생각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시대마다 돌팔이 의사들에 의해서 크게 격려 받는 것들이다.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즐거움이 어떻든 은혜안의 성장이 무엇을 이룩하는지 상관없이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함"(고후 5:4)이 여전히 남아 있음이 사실이다.

본 장에서 우리가 지적한 것은 죄에 대한 견해를 하찮게 여기는 참 성도를 격려하고자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도리어 오직 죄에 대하여 생생한 경험가운데서 거룩의 생명이 시작된다는 것을 말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를 실감하는 것만큼 죄를 싫어하게 만드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사랑에 대한 느낌만큼 자신의 죄악들을 진정으로 애통하게 만드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그 깨달음이 우리 마음을 후려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 자신의 맘에 너무 많이 있음을 고백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룩의 생명은 믿음의 생명이다(날마다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삶이다). 믿음의 열매들은 참된 회개와 참된 겸손과 하나님의 무한하신 오래 참으심과 자비하심을 인한 찬양과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목마름과 더욱 순종하는 자가 되고자 하는 기도생활과 지속적으로 우리의 불순종을 고백하는 것이다.

내주하는 죄로부터 완전한 건짐을 날마다 바라며 육체가 덜 활동하기를 추구하고 우리의 현재의 상태가 더욱 겸손한 자리에 있으며 동시에 내 속의 부패함이 복음적 소망을 죽이지 않게 되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

본 책의 앞 장들을 읽으신 분들은 우리가 기독교인의 삶의 표준을 낮추거나,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정하며(딛 1:16) 속고 있는 영혼들에게 평강을 말하고자 한 것이 결코 아님을 알 것이다. 혹자는 죄성에 대한 견해를 우리가 너무 가볍게 했다고 비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위대한 진리는 단지 인간의 지혜에게 위험한 것임을 나타내는 것들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세상적인 도덕주의자들은 인간에게 선포하는 가치의 근본적인 도움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만 한다. 즉 사람들이 저지른 행위와는 상관없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선포의 근거를 깊이 생각하라. 만일 내가 그것이 중생하지 못한 사람에게 한 말이라고 믿었다면 나는 어떤 두려움이나 가책도 없이 나는 멋대로 죄를 지었을 것이다.

아,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온 구원 얻는 믿음은 항상 죄를 싫어하고 거룩을 사랑하는 원리로 인하여 성취되는 것이다. 그 죄를 소유하고 있는 자의 가장 큰 슬픔은 그 원리를 이루고자 하는 갈망함이 훼방함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훼방하는 것들은 사실 우리의 믿음을 단련하는 것이며 깨끗함을 위하여 매일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게 한다. 오, 여호와여 우리의 믿음을 증가시켜주소서!

Arthur W. Pink 성화론 p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