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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론 (Sanctification)

[성화론 106] 성화론의 도구(완결편)

En Hakkore 2024. 3. 30. 12:05

앞 장에서 우리는 성화에 있어서 믿음의 역할을 대략적으로 다루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 아래서 죄로 인해 힘겨워하고 의심의 안개를 걷어내지 못하고 있고 사단의 미혹에 고통당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에게 큰 위안을 주는 가르침을 제시하고자 한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왜 위로하라 하시는가?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이야말로 지상에 사는 백성들 중 가장 깊은 고통 중에 사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이 때로 지각에 뛰어난 마음 깊은 평강을 누리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을 만끽할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큰 침체에 빠지며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압박과 신음이 그들의 삶에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게 됨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들은 엘림의 우물들과 종려나무들로 인하여 만족스러운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의 삶은 짐승이 울부짖는 광야에서(신 32:10) 살아야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오 내게 비둘기같이 날개가 있다면 훨훨 날아가서 편히 쉬리라"(시 55:6)라는 탄식이 절로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고통스러운 경험은 자신들이 정말 그리스도인이 아닌지 심각한 의식을 낳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와 주변에 사는 명목적인 신앙인들의 낙천적인 삶과 비교하며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아니다. 그렇게 납득할 필요도 없다.

우리 시대의 형식적이고 배교적인 신앙생활은 경솔하고 거품투성이의 사람들만 만들어낼 뿐이다. 그런 자들은 근신하며 진지하고 엄숙한 삶을 사는 자들을 경멸한다. 그런 자들은 자기를 성찰하고 진지하게 살피는 자들을 조소한다. 그리고 무척 경멸한다.

이삭을 납득하려고 하지 말라. 조롱하는 이스마엘이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음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창 21:9). 그 둘이 여전히 아브라함의 집에 함께 살고 있을지라도 어머니가 다른 것이다. 죄로 인해 고통을 받으며 두려운 아픔을 지닌 신자는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와 같은 것이다(시 102.7).

그리고는 "내 소유가 내게 대하여는 무늬 있는 때가 아니냐 매들이 그것을 에워싸지 아니하느냐"(렘 12:9)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하나 됨이 없는 곳에는 교제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많은 자녀들은 마치 아삽과 같은 처지에 있다.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시 73:2-8).

아삽이 그런 자들의 형통함을 보고 크게 흔들리게 된 것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고 있고 자신은 버리셨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적인 모순은 현대판 라오디게아 교회에서도 찾아진다. 종교적으로 크게 흥왕함을 즐기는 신앙인들이 많은 시대가 있다. 그들은 성경에 대한 지식도 상당히 가지고 있다. 그들은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일에 전문가들이다. 그들은 예언의 비밀들에 대하여 큰 빛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영혼을 건지는 일에 상당히 성공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굴곡의 경험도 없다. 고통스러운 뒤틀림이나 나락으로 추락하는 것도 없다. 따라서 마음에 무거운 짐도 없고 창백해짐도 없는 형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섭리는 언제나 그들을 웃게 한다.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용납되었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의심해 본적이 없는 자들이다. 사단은 그들을 건드리지도 않고 그들에게 매일 전염병처럼 내주하는 죄의 요동침도 없다. 자신의 연약함과 무지와 가난함과 악함을 양심적으로 자각하는 가련한 그리스도인들은 그처럼 형통한 자들을 부러워하는 미혹에 빠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음에 원하는 것 이상의 것들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가련한 성도의 원함은 거절되는 것처럼 보이기에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는 것을 계속 잡으려고 추구한다.

그러나 이렇게 형통한 자들의 다른 면들을 주목해보라. 교만이 저희의 목걸이다(시 73:6). 그렇다. 그들은 겸손과 낮아짐에는 매우 낯선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작새의 날개에 만족하며 흥겨워하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더러운 넝마조각으로 간주하심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악하게 압제하며 거만히 말하는 자들이다(시 73:8).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들의 부패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실패들과, 여호와의 얼굴을 숨기심과 그리고 사단의 조롱에 의하여 눌림을 받으며 심히 압박을 받는다. 불신앙의 행위들을 인하여 힘겨워하고 심령의 냉랭함을 인하여 고통하며 그들의 기도가 신실치 못함을 인하여 아파하고 헛된 상상으로 인하여 압박을 받는다.

그러나 현대판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은 거만히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신실한 성도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들을 몹시 싫어하고 그들의 평강과 즐거움과 승리를 비꼰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마시는"(시 73:10) 것은 마치 참 성도들이 지극히 높은 자들의 간증을 듣고자 함같이 그들 역시 자신들이 참 그리스도인으로 여기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이런 자들은 경건치 않은 자들이다. 아삽이 계속해서 말한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도다"(시 73:12). 아삽은 악인들에 대하여 생각할 때 특히 자신이 받은 처량한 몫과 견주어 보면 불만족과 불쾌한 생각이 어찌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시 73:13). 내가 지난 세월 동안 신실하게 순종하여 최선을 다한 것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나는 그들과는 달리 여전히 가난하고 그들이 가진 낙도 흥도 없구나. 나는 그들이 가진 평안도 확신도 승리도 없도다! 도리어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여 아침마다 징책을 보는구나"(시 73:114).

그것이 거룩하게 산 아삽의 경험이었다. 그것 또한 여러분의 경험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현대판 바리새인들이 당신을 경멸함으로써 당신은 경건한 사람들과 동무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

Arthur W. Pink 성화론 p273